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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는 척목 없어 이대론 하늘을 날 수 없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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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호 10면

“괜찮네. 물이나 좀 주게.”
강권 교수가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백두옹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한 세기를 넘게 살아, 진작부터 날 받아놓은 덤 인생인데 목에서 피 몇 방울 나왔다고 웬 호들갑이냐는 핀잔이었다. 배낭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자,백두옹은 입을 헹군 다음 밭은 목을 축였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⑤

“이 무더위에 괜한 나들이를 했네요, 어르신. 좀 쉬셨다가 그만 서울로 돌아가시죠.”

물 적신 휴지로 손을 닦아주면서 강 교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백세가 넘은 상노인이라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나 아직 안 죽네. 대선 때까지 할 일이 남았는데 왜 죽어? 갑자기 너무 목청을 돋워서 그래.”

백두옹은 이견대 마루에 앉아서 부채질을 했다. 합죽선에 ‘운종룡풍종호’가 휘갈겨져 있다. 대숲 바람처럼 시원스러운 초서다. 강 교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옆에 앉아 있다가 백두옹이 안정을 되찾자, 대기하고 있던 택시로 모셨다. 경주 시내에서 죽으로 점심을 하고 상행선 KTX에 올랐다. 백두옹이 자꾸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했지만 강 교수가 말렸다. 당분간 말을 적게 하는 게 좋았다.

“아무리 목이 아파도 이 말만은 해야 쓰겠네. 일본은 1905년 2월 러일전쟁 막바지에 동해에서 전쟁을 유리하게 하려고 독도를 저들 영토로 강제 편입했다네. 그전까지 독도는 변함없는 우리 영토였어. 1902년 대한제국 행정 규칙 자료에도 실효지배 기록이 분명하니까 독도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거리가 못 돼. 진짜 철부지들은 일본의 우익 단체들과 그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일본 지도자들이야! 난 양식 있는 일본의 시민사회힘을 믿는다네.”

정말 못 말리는 노익장이었다. 강 교수는 백두옹을 청담동 댁에 모셔다 드리고 꼭 병원에 가보시라고 일렀다. 노인의 각혈은 폐렴이나 폐암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강 교수는 며칠 동안 답답한 나날을 보냈다. 백두옹의 말처럼 세계는 지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세력 전이(power shift)’가 일어났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와 동시다발적으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 청산은 고사하고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일본은 껍데기만 의회민주주의 체제이지 국민의식 수준은 신격화한 천황 중심 봉건사회다. 재정위기에 빠진 유럽, 피로가 누적된 미국과 달리 동아시아는 급부상하고 있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들은 동아시아를 주목한다. 한·중·일 삼국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잘 살려야 하는데 배타적인 민족감정과 영토분쟁으로 세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러다가 산통 다 깨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안철수 업으면 누구라도 飛龍在天

내남없이 큰 지도자, 큰 리더십이 절실하다. 사소한 이익보다 인류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앞세울 때,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참 지도자, 큰 지도자라면 대중이 듣기 좋은 말만 할 게 아니라 과감하게 ‘노(No)!’라고 외칠 수도 있어야 한다. 인기에 영합하는 모호한 말잔치가 세상을 자꾸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신문사에 보낼 칼럼을 정리하다가 속이 답답해졌다. 아직 대낮인데 냉장고 에서 캔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글을 쓰면서 무음 모드로 해놓았던거 같은데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강권 교수님이시죠?”

또랑또랑한 아가씨 목소리다.

“그렇소만.”

“청담동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못다 한 말씀이 있다며 뵙고 싶어 하세요.”

“은강이?” “네. 오시기 힘들면 그쪽으로 가시겠답니다.”

“무슨 말씀을! 곧장 건너가지.”

나들이를 하겠다는 건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해서 반가웠다. 아직 여쭙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글도 잘 써지지 않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어 강 교수는 택시를 탔다. 백두옹은 거실 소파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뜻밖이었다. 강아지를 어린애 어르듯 하는 노인은 휴지 가져오라는 잔심부름까지 시키면서 대견해 했다. 그런 노인의 얼굴은 천진스러웠다. 누가 저 노인네를 주역의 대가이자 당대의 예언자라고 하겠는가.

“어르신, 강아지를 그렇게 애지중지하실줄 몰랐습니다.”

강 교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래도 이 녀석이 날 제일 좋아한다네. 나 죽어 납골당 가면 이 녀석 사진 놓아 달라 했는걸.”

백두옹이 파안대소한다.

“설마요.”

“정말일세. 아무래도 인간은 인간과 소통하는 거보다 이런 반려동물이나 화초들과 소통하는 편이 훨씬 더 쉬운 것 같아. 집집마다 반려동물과 화초 안 키우는 집 없거든. 따지고 보면 사람만큼 말 안 듣고 말 안 통하는
대상도 드물어. 제 얘기만 해대거든. 모두가 정치인들 욕하지만 그래도 신통한 사람들이야. 반려동물이나 화초 대신 사람을 대화 상대로 선택한 용기가 있잖아. 이 지상에 어디 사람만큼 까다롭고 피곤한 생명체가 또 있
던가?”

백두옹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강 교수는 청부살인업자 레옹이 떠올랐다. 언제 벌어질지 모를 살인극 속에서도 그는 화분 하나를 들고 다니며 정성껏 돌봤다. 사람은 무참히 죽여도 화초는 절대 죽일 수 없다는 듯이.

“진영논리에 갇히면 반대 진영을 개만도 못하게 여길 걸요. 정치인들의 집념은 어떻게 해서든 정권 잡는 거거든요.”

“순 날것들 같으니! 강 교수, 저번에 경주 이견대에서 안철수 원장이 대인이라고 했었지? 야권 후보들이 삼고초려로 만나봐야 할 대인!”

백두옹이 강 교수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김문수와 안철수, 박근혜와 안철수 그림은 왜 못 그리는 건가?”

“에이, 그건 아니죠! 전에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걸 막겠다고 확실히 선언했었답니다.”

“허허허, 과연 그럴까? 정치는 생물이라면서.”

백두옹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붓펜을 들어서 편안할 안(安)자를 써보였다.

“지금으로선 갓(宀) 쓴 여인(女) 안철수(安哲秀)를 잘 업기만 하면 여야 어느 후보라도 비룡재천일세. 경상도 말고도 호남 출신이건 경기도 출신이건 얼마든지 대권을 쟁취할 수 있단 얘기야.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이변이 일어나거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뜻밖의 난기류를 만나거나, 안철수 자신에게 결정적인 변수가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나?”

“갓 쓴 여인 안철수 업기! 재미있는 파자(破字)와 비유네요. 예언자를 자처하신 어르신 말씀대로 안철수는 양중음이라니까 그럴듯해요. 하지만 그 여인은 아주 값비쌉니다. 여야 모든 후보가 안철수를 등에 업고 달리려 하지만 도리어 업히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몽상가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주의잡니다. 따라서 안철수 야권 최종 단일후보론에 한 표!”

강 교수가 단언했다.

“예언자라고? 난 예언자가 못 되네. 하여간 자넨 언제나 결단이 빠르고 명쾌하구먼. 중도는 못 잡더라도 광견은 되겠어.”

“광견이라고요!”

강 교수는 백두옹이 좀 전까지도 강아지를 안고 있던 광경이 생각나서 내심 언짢았다.

“그 광견(狂犬)이 아니라 공자가 이르신 광견(狂狷)을 말하네. 광자(狂者)는 진취적이고, 견자(狷者)는 차마 하지 않는 바가 있거든. 진보적이지만 막말 같은 건 절대 안하지.”

듣고 보니 칭찬이어서 머쓱해졌다. 강 교수는 백두옹의 붓펜 글씨들을 보면서 주역은너무 어려우니 그만두고라도 논어(論語)는 시간 내서 정독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논어를 봐야 주역도 읽을 수 있다던가.

‘안철수 현상’ 타산지석 때 정치 발전

“부끄럽습니다, 어르신.”

“안 원장만 대인은 아닐세. 안 원장 입장에서는 다른 후보들이 대인이 되거든. 안 원장이 출마 선언을 하기 전에 용단을 내려 그 대인을 선택할 수도 있어.”

“성격상 어려울 겁니다.”

강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이 분명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네. 나는 안 원장의 등장이 한국 정치사에서 아주 값진 일대 사건이라고 보네. 그를 흠집 낼 생각만 할 게 아니라 여야 모든 정치인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해. 그러면 한국 정치가 한 단계 발전하는 거니까.”

“놀랍습니다. 저는 어르신께서 안 원장을 탐탁잖게 여기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을 몰고 다니면서 파랑새 타령이나 한다고요.”

강 교수는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들 가운데서 안철수 원장 관련 책들이 몇 권이나 되는 걸 눈여겨보았다.

“날 수구꼴통 취급하지 말게나. 니체는 졸가리 없이 타인들과 똑같은 걸 추구하며 사는 인간을 ‘말종 인간’이라고 했어. 그와 반대로 자기만의 가치기준을 정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이를 ‘초인’이라고 했지. 난 초인도, 예언자도, 자네처럼 학자도 못 되지만 부화뇌동하는 인간은 아닐세.”

백두옹은 음유시인처럼 이육사의 시(詩)를 낭송하는 것이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설마 안 원장이 그 초인이라는 건 아니시죠?”

“…….”

강 교수가 놀라서 묻자, 백두옹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직 여야가 경선을 치르고 있네. 새누리당 최종 후보는 박근혜가 되겠지만 민주통합
당은 아직 누가 될지 몰라. 그리고 안 원장에게는 척목(尺木)이 없다네.”

“척목이라뇨?”

“척목은 용머리에 달린 돌기로, 하늘을 날때 날개로 쓰이는 신물이네. 어느 날 ‘대중이 주는 선물인 우리 시대의 리더십’을 엉겁결에 부여받은 그에게는 아직 그 척목이 없어. 이대론 절대 하늘을 날 수 없지.”

백두옹 특유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다른 후보들은 다 있는데 유독 안철수에게만 없는 것, 그 척목이 뭘까? 강 교수의 두뇌 회전이 빨라졌다.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바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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