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문턱서 알게됐죠, 제가 장애인이란 걸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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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은 김현덕 회장. 경기첨단인쇄디자인센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그는 본업 이상의 열정으로 곰두리봉사회를 이끌고 있다. [강정현 기자]

“대학 졸업 때까지 내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뛰지는 못해도 다른 건 뒤떨어지지 않으니까. 막상 취업문을 두드렸을 때 좌절했죠. 면접 보고 ‘연락주겠다’는 말만 10여 곳에서 들었어요. 1년이 지나자 안타까워하던 매형이 장사를 권했습니다. 그 무렵 나를 돌아보게 됐죠. 장애인에 대한 푸대접을 타파하는데 참여하고 싶었어요. 마침 봉사단체를 준비하던 분들과 연이 닿았습니다.”

 곰두리봉사회 김현덕(52) 회장은 24년 전 봉사회 창단멤버로 참여한 계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그는 충남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구직에 나선 참이었다. 취업장벽에 부딪힌 그는 경기도 안산 한양대 캠퍼스 앞에 문구점을 열었다. 봉사회는 그 이듬해인 1988년 서울 장애인올림픽을 계기로 출발했다. 처음 이름은 ‘곰두리차량봉사대’였다. “장애인 중에 차를 가진 분들이 주축이 돼서 수혜자 대신 봉사자가 돼보자, 장애인 선수들의 이동을 돕자, 의견이 일치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참여 폭이 넓어져 장애인·비장애인 함께 봉사하는 단체가 됐다. 이동수단이 없어 외출을 못하거나 병원을 못가는 이들의 발이 돼줬다.

 최근 봉사회 활동은 이·미용 봉사, 소독·방역 봉사 등 농어촌 재능기부로 확대됐다. “현재는 장애인 콜택시가 전국에 보급됐고, 차를 가진 장애인 분들도 많아요. 차량이동봉사는 줄어든 대신 16개 시·도 지부에서 지역에 맞는 활동을 개발해왔습니다. 가까운 농어촌에서 이발도 해드리고 방역도 한 게 재능기부의 시작이 된 겁니다.” 2년 전 봉사회 중앙회장을 맡은 그는 “전국에서 4000여 명이 봉사활동에 참여해왔다”며 “전국체전, 소년체전, 전국 장애인 체육대회 등 주요행사 때는 지금까지 줄곧 차량이동봉사를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본업은 따로 있다. 현재 수원첨단벤처밸리에 자리한 ‘경기첨단인쇄디자인센터’의 대표이사다. 이 센터는 14개 인쇄업체가 모여 2008년 출범시킨 공동법인이다. “인쇄업이 대개 영세해 큰 일을 맡기 힘들었죠. 혼자 힘으로 안 되면 여럿이 협력하면 되지 않겠느냐, 몇년간 모임을 갖고 고민을 해서 지금 같은 협동화사업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각계에서 많이들 벤치마킹하러 온다”면서 “혼자 자영업하는 분들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를 인쇄업으로 이끈 것은 20여 년 전 시작한 문구점이다. “‘복사 되냐’고 묻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복사기 2대를 들여놓았죠. 문구 판매보다 복사 매출이 많아졌죠. ‘인쇄도 되냐’고들 묻길래 인쇄도 시작했죠.” 그는 문구점에서 평생의 짝도 만났다. 문구점 직원으로 일하던, 누나 친구 여동생이 지금의 부인이다. 생업에 암만 바빠도 봉사활동에 열심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일 중요한 건 즐기면서 한다는 겁니다. 스포츠를 즐기듯, 제게는 봉사가 즐거운 일입니다.”

김 회장처럼 농어촌 지역에 재능기부를 하려는 이들을 위한 사이트가 있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운영하는 스마일재능뱅크(www.smilebank.kr)다. 재능을 기부할 개인·단체·기업과 이를 필요로 하는 지역을 연계해주는 서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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