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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 왕따 장면 찍어 아버지께 알리고 싶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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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호 12면

최정동 기자

#내성적인 소년 타일러는 운동신경이 둔해 체육시간엔 늘 외톨이였다. 급우들은 그를 ‘괴짜’ 혹은 ‘호모’라고 놀렸다. 머리를 사물함에 쑤셔 박거나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 벽으로 밀어 바지를 오줌에 젖게 하는 건 예사였다. “너같이 쓸모없는 놈은 목이나 매고 죽으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 ‘걸어다니는 과녁’이었던 타일러는 17세가 되던 해 자신의 방 벽장에 목을 매 세상을 떠났다.

미국 反왕따 캠페인 ‘불리 프로젝트’ 벌이는 영화감독 리 허시

#흑인 소녀 저메야(14)는 농구를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졸업하면 해군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다. 홀로 부양의 짐을 진 엄마를 돕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학교 생활은 지옥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보기만 하면 바보·멍청이라고 놀리며 물건을 집어 던졌다. 참다 못한 소녀는 엄마의 총을 훔쳐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위협한다. 폭행미수죄로 정신과 병동에 수감된 저메야는 석 달간 입원치료를 받은 뒤 석방된다.

무엇이 평범한 아이들을 자살과 폭행미수 등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을까. 올해 4월 미국 백악관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불리(Bully)’가 던진 질문이다. 이 영화엔 타일러와 저메야를 비롯한 왕따 피해 청소년 5명의 사연이 담겼다. 인기가 없는 아이, 지능이 낮고 얼굴에 기형이 있는 아이, 성적 정체성이 다른 아이 등이 왕따의 제물이 됐다. 타일러 등 2명은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백악관 수석보좌관 밸러리 재럿은 상영이 끝난 뒤 “우리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개의 왕따 방지 법안에 서명해 왕따 근절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여 줬다.

24일 서울에서 폐막한 제9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초청으로 내한한 ‘불리’의 리 허시(40) 감독을 만났다. 그는 1년간 한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현장을 포함한 이 영화로 백악관·교육부, 양대 교원단체인 미국교사연맹(AFT)·전미교육협회(NEA) 등과 반(反)왕따 캠페인 ‘불리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미국 학생 12만여 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개봉 당시 청소년 관람불가인 R등급을 받자 영부인 미셸 오바마, 배우 메릴 스트리프·조니 뎁 등 30만 명이 등급 조정운동을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왕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나도 왕따 피해자다. 초등학교부터 고교 초반까지 지속적인 괴롭힘에 시달렸다. 놀림의 주된 이유는 옷차림이었다. 부모님이 또래 아이들 부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내 옷을 좀 촌스럽게 입혔던 것 같다. 거의 매일같이 아이들이 머리를 쥐어박고 욕설을 퍼부었다. 한 번 괴롭힘이 시작되면 대체 언제 끝날지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한테 하소연을 하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만 했다. 나쁘거나 무관심한 부모는 아니었지만 도와주진 않았다. ‘내가 왕따당하는 이 상황을 찍어 아버지한테 보여 주면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텐데’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왕따당하는 순간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남들에게 정확하게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다.”

-다큐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2010년 뉴저지주 럿거스대에 다니던 1학년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다. 그 학생은 게이였는데 기숙사 친구들이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동성애 장면을 촬영했다. 친구들이 트위터 등에 ‘파일을 공개하겠다’고 글을 올린 바로 다음 날 투신자살했다.”

-아이오와주에 사는 안면기형 소년(알렉스)이 실제 왕따당하는 현장을 촬영했는데.
“왕따 가해자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잘 모른다. 알아도 ‘아직 애들이라 뭘 잘 몰라 그렇지’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렇게만 보기엔 피해가 너무나 심각하고 피해자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왕따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면 인식이 바뀌지 않을까 싶었다. 1년 동안 영화를 찍게 해 줄 학교가 과연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학교를 접촉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다 알렉스가 다니는 학교에서 승낙을 했다. 그 학교는 더러운 빨랫감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듯 학교 내부를 투명하게 공개했다.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우리에겐 큰 선물이었다. 전 세계 사람이 왕따 현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다.”

-학교에서 그렇게 하게 해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 학교는 소위 ‘문제 학교’는 아니었다. 평범한 학교였지만 만약 자신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왕따 문제가 있다면 공론화해 변화의 계기로 삼길 원했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처음부터 촬영을 흔쾌히 허락했나.
“그들을 내가 영화로 찍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리 프로젝트’를 같이하는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내가 왕따당한 경험을 아이들과 공유하니 대화가 더 잘됐다. 알렉스는 자신이 당하는 상황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등하굣길 스쿨버스에 내가 카메라를 들고 동승했지만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알렉스의 부모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곧 결심을 했다. 용기 있고 고마운 일이었다.”

-미국에선 하루 16만 명의 학생이 왕따가 무서워 결석한다는 통계가 있다.
“나는 그 통계가 미국의 왕따 피해자가 연간 1300만 명이라는 사실보다 더 피부에 와 닿고 더 심각하다고 본다. 왕따 때문에 학교를 못 갈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괴롭힘이 심하단 얘기인가.”

-미국도 왕따 피해자에 대해 ‘뭔가 문제가 있으니 따돌림을 당한다’는 인식이 있나.
“당연하다. 제일 슬픈 건 피해자가 ‘내가 모자라 친구들이 괴롭히나’라고 자책하는 거다. 괴롭힘을 지속적으로 당하다 보면 스스로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알렉스가 “이젠 괴로운지도 잘 모르겠다”고 부모한테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많이 울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촬영 중 감정적으로 흔들린 순간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자살한 두 소년의 부모들을 만났을 때가 제일 힘들었다.”

-한국도 ‘불리사이드(bullycide·왕따 피해자의 자살)’가 올해 들어 잇따라 발생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한 ‘사이버불링’도 나타난다. 왕따가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왕따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미국에서도 분분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흔히 ‘정상’ 혹은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기준에서 벗어날 때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배려와 공감, 감수성을 학교와 가정에서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남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게 공부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어려서부터 깨닫게 해야 한다.”

-경쟁 일변도 교육이 인성을 황폐하게 해 학교폭력의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있는데.
“미묘한 문제다. 경쟁은 더 나은 성취를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요소다. 다만 학업뿐 아니라 모든 개개인의 가치를 골고루 중시할 수 있는 문화를 학교에서 만들 수 있느냐, 여러 종류의 아이들을 다양하게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느냐가 핵심 아닐까 싶다.”

-‘불리 프로젝트’는 미디어가 사회 문제를 환기하고 동참을 촉구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례가 된 것 같다.
“나를 포함해 많은 다큐 감독이 영화를 통해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다. ‘불리’를 보고 난 학생들 반응이 ‘더 이상 내 주변의 왕따 문제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큰 수확이다. 이 영화를 100만 명의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이상 왕따 같은 학교폭력을 그냥 둬선 안 된다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극적인 인식전환의 순간)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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