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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임기 말 일본과 멀어지는 대통령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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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이명박 대통령은 이른바 6·3세대다.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 시절인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시위를 주동했다. 그는 국교정상화에 대해 “일제가 사과하고 들어와야 할 성격의 일이지, 우리 쪽에서 먼저 그것도 밀실협상을 통해 손을 벌리고 들어간다는 건 민족적 감정이 용납할 수 없었다”(『신화는 없다』)고 썼다.

 대통령이 돼선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했다. 당선자 시절에 “성숙한 한·일 관계를 위해 (일본에) 사과하라 반성하라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해 4월 방일해선 독도나 과거사 문제를 우회했다. 진보 진영에선 내내 ‘친일(親日)’이라고 의심했다.

 지난해 군대위안부 문제가 타오른 이후엔 달라졌다. 이 대통령은 그해 말 교토에서 “성의 있는 조치가 없으면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제2, 제3의 동상이 세워질 것”이라고 분노했다. 57분 회담 중 45분을 위안부 문제에 할애했다. 지난 10일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독도에 발을 내디뎠다. 그로부터 나흘 뒤엔 일왕의 사과를 촉구하며 “몇 달 고민하다 통석의 염(痛惜의 念), 뭐 이런 단어 하나 찾아올 거면 올 필요 없다”고 말했다. 즉석 문답 과정에서 나온 우발적 발언이라곤 하나 일본이 가장 민감해할 얘기를 한 거다. 이 대통령은 어쩌면 일본과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가장 멀어진 대통령일지 모른다.

 이런 선회가 그러나 낯설지 않다. 과거 대통령도 초기엔 늘 과거 대신 미래를 보고 싶어 했다. “한국과 일본이 불행한 과거사를 정리하고 진정한 미래의 동반자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고 되풀이했다. 하지만 임기 말로 갈수록 일본 메시지가 강해지곤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도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독도 담화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이라고 외쳤다. 1970년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교과서 왜곡 문제가 터지자 “충격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미래의 대통령이라고 다를까. 회의적이다. 일본과의 거리는 앞으로도 5년 안팎의 주기로 늘었다 줄었다 할 가능성이 크다. 임기 말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 때문이라고? 시야가 좁은 거다. 근본적으론 일본이 독일과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은 늘 과거사 해결에 미적댔다. 자신을 전쟁 패배자로 여길 뿐 가해자란 인식은 흐릿했다. 식민통치에 대해서도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여긴다. 더욱이 근래 우경화 추세다. 한때 G2였다가 그 자리를 중국에 내주었다. 추월당한 사람의 심리를 떠올려 보라. 우리가 일본에 화낼 일이 더 많아질 거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매년 300만 명의 일본인이 한국을 찾는다는 사실 말이다. 20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간다. 우리에게 일본은 2위 교역국이고 일본에 우리는 3위 교역국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 한·일 통화스와프 체결로 가슴 쓸어내린 사람이 여럿이다. 북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한·일 정보 교류 잘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제법 있다. 여전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란 얘기다. 게다가 강국이다. 취임하는 대통령마다 일본과 새출발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다.

 일본은 이렇듯 양가(兩價)적이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의 균형점이 중요하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태도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독도 방문이란 충격요법이 필요했겠지만 일왕까지 거론한 건 지나치다. 과거에 대통령의 독도 방문 등 강경 대응을 요구했다가 막상 실행하니 ‘나쁜 통치’라고 비난하는 민주통합당의 태도도 옳지 않다.

 일본의 도움으로 포항제철을 세워 결국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한 박태준 전 총리가 생전에 한 말이다. “한·일 관계에 관한 한 이성보다는 감정에 맡겨버리는 경향이 풍미한 건 사실이다. 우리가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 우리 모두 감정을 누르고 이성을 키워갑시다.” 1992년 9월 발언이니 딱 20년 전 얘기인데 지금도 유효한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