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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9)

중앙일보

입력

59. 국제금융 4인방

나를 포함해 주병국(朱炳國) 전 재무차관, 홍재형(洪在馨) 전 부총리(현 민주당 의원), 이용성(李勇成) 전 은행감독원장 등 재무부 국제금융국 출신 4인방은 국제금융 사이드에서 각각 15~20년씩 근무했다. 그 자체가 요즘 같으면 바라기 어려운 요행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팀웍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모두 런던이나 뉴욕에 재무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나와 홍재형 의원이 런던에, 주병국 전 차관과 이용성 전 원장이 뉴욕에 근무했었다.

일찍이 국제금융의 본무대에 나가 금융 자율화.개방화의 세례를 받은 셈이었다. 한눈팔지 않고 외환정책 업무에만 매진했던 우리들은 시쳇말로 드림팀이었다.

고시 출신이 아니면 국장자리도 바라보기 힘들던 시절 우리는 공교롭게도 넷 다 고시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직사회에서 또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유학파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였지만 홍의원과 내가 재무장관.부총리를 지냈고, 주 전 차관이 내 뒤를 이어 국제금융차관보 자리를 거쳤다.

이 전 원장은 국제금융국장을 거쳐 재무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냈다. 당시 기획관리실장은 국제금융차관보 자리가 없어지며 사실상 그 업무를 흡수하고 있었다.

이 전 원장을 뺀 나머지 세 사람은 또 외환은행장을 역임했다.

지금도 서로 형제처럼 지내는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나와 이런 저런 인연을 맺고 있다. 특히 고등학교.대학 동기 동창인 주 전 차관과 나는 동료이자 친구로 사무관 시절부터 외환과에 같이 있었고 외환국에서 나란히 과장을 지냈다.

각각 뉴욕과 런던에 재무관으로 나가 있다가 1974년 6월 오일 쇼크의 타격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내가 한 발 먼저 돌아오는 바람에 한 걸음 앞서가게 됐을 뿐이다.

이들은 또 바른 말 잘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내 뒤를 이어 외환은행장이 된 주 전 차관은 이미 밝힌 대로 재무장관으로 있던 내가 부실상태에 있던 대한선주의 부도를 막아 달라고 하자 "은행장으로서 배임행위" 라며 난색을 표했다.

홍 의원은 97년 말 외환위기 전야 YS에게 국제통화기금(IMF)에 대한 구제금융 신청이 불가피하다고 건의했다.

98년 2월 한 신문은 YS가 "건의를 받고 한때 그를 다시 경제부총리에 기용하는 방안까지 생각했으나 그가 국민신당에 합류한 상태라 포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 보도했다. 이 전 원장은 은감원장으로 있던 YS 정권 시절 검찰로부터 불법적인 비자금 계좌 추적을 의뢰받고 "영장을 가져오라" 며 거부했던 사람이다.

70년 내가 처음으로 나간 주영대사관 재무관 사무실은 훗날 명당 소리를 들었다. 네 평에 불과한 좁은 방에서 나를 포함해 홍재형 의원, 임창열(林昌烈) 경기도지사 등 3명의 경제부총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옆방을 사용한 경제협력관 출신의 진념(陳(禾+念)) 부총리까지 치면 주영대사관에서 4명의 부총리가 나온 셈이다.

나는 국제금융국장.은감원장을 유망한 자리로 만드는 데도 한몫 했다. 은감원장 출신으로 재무장관을 지낸 것은 내가 첫 케이스였다.

재무부 국제금융차관보 시절인 77년 4월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은 아시아개발은행(ADB) 총회 개회식에 맞춰 역내의 공무원과 금융인들을 다루는 난을 신설하고 첫 회에 나를 소개했다.

이 기사는 '한국 최대의 차입자 정인용을 만나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당시 나는 아시아의 큰 손 차입자(borrower)로 알려져 있었다. 오일 쇼크 이후 외국에서 돈을 꾸는 게 나의 주요 업무였기 때문이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eyewhysy@nownuri.net>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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