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99만원 후원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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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강민석 탐사기획팀 기자

17대 국회의원에 대한 후원자의 기부 내역을 보면 요즘 말로 '생뚱맞아' 보이는 부분이 있다. 한 사람이 99만원씩 기부한 대목이 그렇다. 심지어 어떤 이는 99만7000원을 후원하기도 했다. 3000원이 아까워서 '일인치'부족하게 돈을 준 걸까. 원인은 현행 정치자금법에서 찾을 수 있다. 100만원 이상 후원할 때는 반드시 신용카드나 수표를 써야 한다. 실명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말이다. 후원자들이 바로 이 실명 확인 조항을 피하려 했을 것으로 선관위는 보고 있다. 100만원 미만을 현찰로 주면 실명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얼굴 없는 후원자'들에 대한 신상 추적 과정에서 기자는 열린우리당 M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500만원을 후원한 H씨와의 관계를 물었다. M의원의 답변.

"몰라. 온라인으로 돈을 보내 오긴 했는데,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고…. 나도 누군지 궁금해."

후원자가 후원인에게까지 자신을 숨긴 경우였다. H씨는 대기업 관계자임이 취재 결과 추후 확인됐다.

주부 명의로 1000만원 이상의 거액을 낸 후원자들, 직업을 회사원이라고 적은 은행장, 자영업으로 기재한 중견회사 사장…. 본지가 신상을 공개한'얼굴 없는 후원자'의 대부분은 '99만원 기부자'와 비슷한 심리였을 것이다.

정당한 기부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제도는 정치와 돈 간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도입됐는데도'음습한'기부 관행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의식이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탓이다.

지금 정치권 일각에선 정치자금의 현실화를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연간 모금한도(1억5000만원) 확대 및 법인의 정치자금 기부 허용 등이 그 골자다. 하지만 논의에 앞서 분명히 해야 할 일은 돈을 내는 사람이나 이를 받아서 선관위에 신고하는 의원들이 더 투명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어렵게 만들어진 정치자금 공개제도인가.

강민석 탐사기획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