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홍승찬 교수가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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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숱한 책을 접했고, 그 책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을 만나 수많은 사연을 나누었지만 마흔 가까운 나이의 지금도 어려서 처음 읽은 동화책에 관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얼마 되지 않아 선물로 받은 50권짜리 동화전집(계몽사) 은 정말이지 어린 시절의 꿈 그 자체였다.

문고판 크기에다 누런 갱지 위에 깨알같은 글씨가 박힌 책이었지만 하드커버에 붉은색 종이를 바르고 삽화를 넣은 책표지는 당시로는 흔치 않은 사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얇은 합판에 니스칠을 한 책장까지 덤으로 줄 정도였다면 아마도 부모님의 부담이 작지 않았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 가운데는 〈안데르센 동화〉도 있었고 〈그림 동화〉도 있었다. 그 때는 왜 〈그림 동화〉에 막상 그림이 없는지 의아했었음을 고백한다.

그 무렵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그저 신기하기만 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만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단숨에 50권을 다 읽어치우고는 다시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책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낱장 하나하나까지도 흩어져 버렸다.

책읽기를 즐기는 아들이 기특했는지 그후로도 부모님은 생일이나 졸업.입학을 맞을 때마다 책선물을 주셨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까지는 역사책과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

〈세계 위인 전집〉과 〈이야기 한국사〉를 읽었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탐독했다. 한때는 정복자의 세계에 몰입해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나폴레옹은 물론이고 심지어 히틀러까지 숭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듯 경직된 사고는 문학서적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많은 소설책이 잠 못이루는 밤을 선사했지만 그 중에서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잊을 수 없는 추억까지 만들어 주었다.

1천19쪽이나 되는 그 소설을 사흘만에 다 읽었을 때 마침 같은 제목의 영화가 시내 개봉관에서 막바지 상영 중이었다.

중학교 3학년 보충수업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학교 담을 넘어 영화를 보러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일어난 일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언제부턴가 강의를 하면서 소설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영화 이야기를 꺼낼 때가 많다.

그런데 이제는 '레트 버틀러' 는 고사하고 '클라크 게이블' 도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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