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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의 일생] 한국경제 큰 족적

중앙일보

입력

한국경제의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이 21일 삶을 마감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 굴지의 기업군을 창업했고, 내친 김에 대권에까지 도전했던 그의 일생은 풍운아다운 면모로 가득하다.

경제인 정주영은 남다른 추진력으로 성장을 거듭했고, 역경을 땀으로 극복하면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는 '현대 정신' 을 창조해 냈다.

그는 지난해 6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방북하는 등 대북사업에 마지막 열정을 쏟다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기업은 현실이요, 행동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기업은 클 수 없다. 우선 행동해야 한다" 고 강조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행동하는 기업인이었다.

◇ 농부의 아들에서 재벌로〓鄭전명예회장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정봉식(鄭俸植)씨와 한성실(韓成實)씨 사이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호 아산(峨山)은 고향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부친은 가난한 농사꾼으로 장남인 鄭전명예회장에게 가업을 잇도록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청년 정주영은 고향에 머물려하지 않았다. 열아홉살 때인 34년 서울로 올라와 복흥(福興)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재벌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쌀가게에서 돈을 벌어 현대자동차의 모태가 된 자동차 수리공장인 '아도 서비스' 를 차렸고, 해방 이듬해인 46년 서울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 로 자리잡았다. 그는 수리대금을 받기 위해 관청을 들를 때 건설업자들이 한꺼번에 몇천원씩 되는 공사비를 받아가는 것을 보고 회사 건물 안에 '현대토건사' 라는 간판을 함께 내걸었다.

6.25 전쟁은 鄭전명예회장에게 도약의 계기가 됐다. 친동생 정인영(鄭仁永)씨가 미군 공병대 통역원으로 일한 것을 계기로 미군 10만여명의 숙소를 만드는 일을 현대가 맡은 것. 鄭전명예회장은 이 무렵을 "한달 일하고 나니 방에 돈이 가득 찼다" 고 회고했다.

현대건설은 57년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낸 데 이어 경기도 오산 공군기지 활주로, 소양강 다목적댐,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를 잇따라 수주하면서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이와 함께 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시작으로 괌 군사기지 공사, 파푸아뉴기니 수력 발전소, 메콩강 준설공사 등을 계속 따내 해외 건설의 기반을 잡았다.

鄭전명예회장은 7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항 공사를 9억3천만달러에 수주해 이곳에서 번 돈을 재원으로 대규모 제조업 투자의 길을 열었다.

그는 67년에 현대자동차, 73년에 현대조선중공업(현 현대중공업)을 설립함으로써 건설.조선.자동차를 3대 축으로 재벌의 사업구조를 갖췄다. 83년에는 현대전자를 설립함으로써 한국 최대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 정치판에선 좌절 맛봐=鄭전명예회장은 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선임돼 10년 동안 재계의 수장 역할을 했다. 81년에는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돼 88 올림픽 유치에 기여하는 등 체육인으로서도 활동했으며, 이런 점을 인정받아 올 초 한국체육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정주영씨는 87년 2월 동생 세영씨에게 그룹 회장직을 넘기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기업경영 방식을 정치에 도입하겠다며 정치에 관심을 보이던 그는 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해 14대 총선에선 표몰이에 성공해 정치인으로 기반을 잡는 듯했다. 여세를 몰아 대통령선거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뒤 건강도 나빠졌다.

이같은 그의 행보 때문에 현대그룹은 직.간접적인 제재를 받았다. 김영삼 정권 시절 현대는 대출에도 제한을 받아 투자를 적기에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 마지막 열정 대북사업에=그는 대기업 총수로는 처음으로 89년 북한을 방문했으며, 그 뒤 줄곧 현대의 대북사업을 진두 지휘했다.

98년에는 소 5백마리를 몰고 방북해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 등 대북사업의 선봉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그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세차례 만났으며, 남북한 통일농구대회를 성사시키는 등 민간 차원의 남북간 긴장완화에 기여했다.

鄭전명예회장은 "내 평생 마지막 사업은 대북사업" 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룹도 대북사업을 주도해온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에게 승계함으로써 자신이 이루지 못한 숙원을 대(代)를 이어 이루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6월 말에는 정몽헌 회장과 함께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교착상태에 빠진 현대의 대북사업을 일괄타결하기도 했다. 鄭전명예회장은 이때 금강산 일대를 경제특구로 지정받고, 서해안 공단 부지 선정을 위한 북측의 결단을 얻어내기도 했다.

◇ 말년엔 마음 고생도=鄭전명예회장은 중요한 문제를 혼자 결정하는 등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현대그룹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몽구.몽헌씨 등 아들간의 분쟁과 모기업인 현대건설의 몰락, 금강산사업의 좌초 위기 등이 그의 건강악화와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그는 현대투신 부실과 현대건설의 유동성 문제로 그룹이 어려움에 처하자 5월 말에는 3부자 동반퇴진이라는 카드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퇴진을 거부해 속을 태우기도 했다. 현대 고위 관계자는 "鄭전명예회장이 말년에는 아들간의 분쟁 등으로 마음고생이 많았다" 고 말했다.

鄭전명예회장으로선 특히 자신이 53년 동안 분신처럼 키워온 현대건설이 자칫하면 출자전환으로 주인이 바뀔 상황에서 생을 마감해 주변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김남중 기자 njkim@joongang.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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