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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노인식당엔 넥타이 부대 … 1700원 컵밥도 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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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 구내식당에서 사원증을 목에 건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강정현 기자]

5일 오전 11시30분 서울 여의도 우리투자증권빌딩 지하 1층 구내식당. 우리투자증권 사원들이 길게 늘어선 줄 끝에 다른 증권사 사원증을 목에 건 박모(32)씨를 발견했다. 멋쩍은 표정의 박씨는 “우리 회사 구내식당보다 여기가 1000원 정도 싸서 일주일에 세 번쯤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며 웃었다. 우리투자증권의 6년 차 직원 김모(33)씨는 “다른 회사 사람을 가끔 보지만 이상하지 않다. 월급쟁이들이 다 똑같은 처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도 요즘엔 커피값 아끼려고 매점에서 캔커피로 때운다”고 덧붙였다.

 점심값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직장인들이 남의 회사 구내식당에서 ‘눈칫밥’도 마다 않고 있다. 1000원이라도 더 싼 식당을 찾아 점심시간 원정길에 나서는 직장인도 많다. 또 용돈이 넉넉지 않은 취업준비생이나 수험생들은 노점에서 ‘컵밥’으로 한 끼를 때운다.

 여의도 일반 식당의 김치찌개 한 그릇은 적어도 7000원이고, 회사 구내식당 점심값은 4000원 안팎. 구내식당 관계자는 “밥값이 좀 싸니까 외부인들이 지난해보다 40% 이상 늘었다”며 “우리 직원이 먼저 먹은 뒤 나중에 외부인을 입장시킨다”고 전했다.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근처에는 60~70대 고령자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에 점심을 내놓는 식당이 적지 않다. 탑골공원에서 시간을 때우는 60~70대들을 위한 식당이지만 요즘엔 넥타이차림의 직장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곳 ‘유진식당’에서 3000원짜리 설렁탕을 주문한 이모(35)씨는 “광화문에 있는 회사에서 낙원동까지 걸어왔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50여 년째 한식당을 운영 중인 문용춘(85) 사장은 “하루 평균 150명이 먹고 가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직장인인 것 같다”며 “노인분들이 최근엔 자리 잡기가 힘드니 아예 오후 1시가 넘어 오신다”고 소개했다.

 노량진 학원가에서는 노점상과 지역 식당들이 점심값 때문에 갈등을 빚기도 한다. 일회용 용기에 참치·김치·비엔나소시지·치즈·스팸을 밥과 함께 담아 주는 10여 개의 노점상이 번창하자 손님을 뺏긴 주변 식당들이 구청에 노점상을 단속해 달라는 민원을 낸 것이다. 노점에서 파는 컵밥은 메뉴에 따라 가장 저렴한 것은 1700원, 가장 비싼 게 3000원이다. 서울 사립대로 편입시험을 준비 중인 노모(24)씨는 “집에서 학원비 타는 게 눈치도 보이고 해서 한 달 전부터 점심은 매일 컵밥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경찰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정모(25)씨는 “책도 사야 하고 시험 준비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 컵밥을 먹으면 점심과 저녁 두 끼를 5000원에 해결할 수 있어 매일 먹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변 식당은 울상이다. 컵밥을 파는 노점 맞은편 골목에서 뷔페형 고시식당을 운영하는 이모(56)씨는 “컵밥 때문에 3500원짜리 식권 매출이 줄었다”며 “식권 10개를 3만원에 파는데도 장사가 안 된다”고 하소연했다.

위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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