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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웃음 속에 감춰진 삶의 고단함

중앙일보

입력

매주 토요일 스테이크를 메뉴로 하는 참 허무맹랑한 개가 있습니다. 아니, 개보다 더 허무맹랑한 것은 자기 가족이 먹기 위해 개의 먹이로 이용한다는 변명을 들이대는 어른들입니다. 외식을 한 뒤에는 반드시 개에게 먹이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남은 스테이크를 싸 들고 나서는 정말 못말리는 한 가족의 이야기. 웃음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심서영 컬러링, 최경은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는 정말 웃기는 책입니다. 큼지막한 스테이크로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풍요로운 저녁 식사를 위해 기꺼이 '스테이크를 먹는 개'가 돼야 하는 이 개의 이름은 프란치입니다.

'앉아'라는 주인의 명령에 어김없이 주인의 얼굴을 핥고, '뛰어'라는 명령에는 누워서 배를 긁어대는 떠돌이 개 '미쉬코'도 있습니다. 이 개는 붉은 양탄자에 오줌을 누는 야릇한 습관이 있지요. 그 개의 배설 습관을 고쳐 주려는 주인의 노력도 가상합니다. 양탄자를 회색으로 바꾸고 정원으로 끌고 가 배설을 시키려고 무던히도 애쓰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나중에는 붉은 양탄자에 오줌을 눌 때마다 창 밖으로 그 개를 집어던져 보지만, 어느 새 그 개는 오줌을 눈 뒤 스스로 창 밖으로 뛰어 나갑니다.

한 가족과 개, 그리고 그 이웃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상 잡사를 유머러스하게 펼친 농담처럼 가벼운 이야기책입니다. 원래는 '아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이야기책'이라고 돼 있었다지만,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보기에 훨씬 재미있습니다. 아이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로서는 느끼기 어려운 삶의 페이소스가 담긴 이 이야기들은 어른들이 함께 보면 더 좋을 것입니다.

좌충우돌하는 어른의 이야기는 그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굳이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 생활의 굴레에서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어느 날 화자인 주인공은 녹슨 난로에 은빛 페인트 칠을 하게 됩니다. 아내가 외출한 뒤에 시작되는 이 페인트 공사는 금세 끝나지 않습니다. 남은 페인트로 주인공은 낡은 문고리, 수도꼭지, 냄비에 은빛을 입힙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선인장 화분은 물론이고, 선인장에까지 은빛 페인트를 칠하고, 오토바이의 바퀴, 재떨이, 구둣주걱, 라디오, 신발, 백과사전, 손수건, 넥타이, 심지어는 정원의 어린 꽃송이에까지 페인트를 바르게 됩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는 온 집안이 은빛으로 바뀐 것에 기뻐하지 않았고 도리어 호텔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은빛 페인트가 두껍게 칠해진 가방을 열 수가 없어 집을 못 꾸린 그녀가 망연자실 흐느끼고 있는 동안 주인공은 아내의 손톱에까지 은빛 페인트를 칠합니다. 정말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잃어버린 우산을 찾기 위해 온 도시를 헤매다가 결국은 우산을 찾는 것보다는 날씨가 맑게 개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결론짓는 사람이고 보니, 더 할 말이 없지요. 읽는 이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과장한 지은이의 숨은 의도를 한 풀 벗기고 보면, 주인공은 지극히 평범한 중년의 남자입니다. 그가 번번이 되풀이하는 일상에서의 하찮은 실수도 어쩌면 우리들이 늘 범하고 지내는 실수입니다.

결국 이 사소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지은이의 생각은 우리 삶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눈물나도록 엉뚱한 고달픔을 웃음으로 날려버리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풍자요 해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서양식으로 이야기하면 카타르시스이고, 유머이겠지요.

짧은 웃음, 그 뒤에 담긴 삶의 고단함을 읽어내는 것이 아이들 몫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이 책은 아무리 '아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이야기책'이라 하더라도 '어른들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아주 슬픈 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고규홍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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