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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몇 살이나 먹었어?”… 왜 싸움은 늘 이렇게 시작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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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찾기는 공부의 기본이다. 어학사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각종 지식의 편집 과정을 보여주는 전문 사전을 뜻한다. 독일에서 유학을 시작했을 때, 시도 때도 없이 두덴(DUDEN) 사전을 펼치는 독일 학생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생소했다. 총 12권의 두덴 사전은 정서법부터 동의어·외래어·어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동일한 단어가 각기 다른 12가지 맥락으로 설명된다는 이야기다. 애매한 상황이면 사전을 찾고 정확한 뜻을 확인해야만 하는 독일인 특유의 강박적 태도가 오늘날 독일의 치밀한 기계·자동차 산업을 가능케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뢰자의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돼야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의사전달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사전은 언어가 어떻게 구성돼 왔는가를 보여준다. 언어로 표현되는 개념·지식이 어떻게 편집돼 왔는가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일본에도 독일만큼이나 다양한 사전이 존재한다. 일본사전의 치밀함과 정확함은 결코 독일에 뒤지지 않는다. ‘개인(個人)’에 관한 문화사적 편집 과정을 추적하며 난 또다시 탄복하게 된다.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나오는 ‘고지엔(<5E83><8F9E>苑)’도 물론 훌륭하지만, 총 12권으로 된 ‘일본국어대사전’은 각 단어가 도대체 어느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었는지 해당연도, 날짜까지 밝혀준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개인’의 역사적 구성 과정을 일본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돼 있다. ‘국가나 사회, 또는 어떤 단체 등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사람, 일 개인 또는 그 사람의 지위나 직업 등의 측면을 분리한 인간으로서의 한 사람.’ 바로 이어서 바바 고초(馬場狐蝶)의 流水日記(1894)라는 작품의 3월 3일자 기록에 나타난 ‘인류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개인은 확실히 썩어가는 것인가?’라는 문장과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1906)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것은 단지 개인을 위한 혈기정신병의 행동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소개하며 ‘개인’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문장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마디로 ‘허걱’이다.

집단에서 풀려난 개인, 또 다른 집단으로
‘society’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시대 초기의 지식인들은 거의 모든 서구 문헌에 등장하는 ‘individual’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허둥댔다. 야나부 아키라(柳父章)에 따르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 주체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individual’에 대응하는 개념이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들은 individual을 독일개인(獨一<4E2A>人), 독일개인(獨一個人), 독일자(獨一者), 일척수(一隻獸), 일체(一體), 일물(一物), 혹은 히토리(ひとり· 혼자) 등으로 제각기 번역했다. 그중에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처음 사용한 ‘독일개인(獨一個人)’이 주로 사용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독(獨)’이 떨어져 나가고, 이어 일(一)까지 떨어져 나가 오늘날의 ‘개인’이 individual의 번역어로 자리 잡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더불어 서구문화 소개에 앞장선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는 individual을 ‘일신의 품행’으로, society는 ‘동료와의 교제’로 번역했다. 서구 근대문명을 구성하는 두 개의 큰 개념 축인 사회와 개인의 편집 과정을 고려한다면, ‘낱개(個)’를 쓴 숫자로서의 의미일 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개인’보다는, 니시무라 시게키의 ‘일신의 품행’이 individual의 화용론적 맥락에 더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개인이란 문명화 과정의 개별적 반복, 즉 발달과 성장의 산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문명화(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은 원래 ‘예절 바른’을 뜻하고, ‘사회적인(social)’이라는 단어와는 거의 동의어로 쓰였다. 문명화란 말 그대로 품위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의 발전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문명화 과정의 핵심 내용인 ‘합리화(rationalization)’란 본능적 감정표현을 세련된 형태로 변형시켜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일상의 리추얼(ritual)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이라는 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주장이다. 스포츠 경기를 통한 공격성과 호전성의 일상적 발산이 그 예가 된다.

합리적인 문명사회는 각 개인이 예절 바른 교양인이 돼야 함을 전제로 한다. 서구 근대에서 아동 개념의 탄생은 이러한 교양교육의 맥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게 필리프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그저 ‘작은 어른’일 따름이었던 아이들이 아동의 개념으로 수렴돼 별도의 교육을 받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원시성을 억제할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발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콜레주나 아카데미와 같은 근대 초기 교육기관에서는 감시·통제·처벌과 같은 교육원리를 통해 아동들을 자기통제가 가능한 성인으로 양육하고자 했다. 아동들이 학교에서 입어야 했던 의상이 한 시대 전의 군대의복을 흉내 낸 이유도 이런 자기통제의 상징적 표현이었다.(목까지 단추를 채우게 돼 있는 일본식 남자교복은 근대 유럽 군인의 제복을 모방한 것이고 여학생들의 세일러복은 해군 군복을 흉내 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학생들의 세일러복은 일본 남자들의 변태적 욕망의 기호로 자리잡기도 한다. 욕망의 억압은 또 다른 변종 욕망을 낳는다는 이야기다.)

아동 개념이 형성되고, 이에 상응하는 아동 교육기관이 생겨나며 근대 교육이데올로기는 점차 세련돼졌다. 무엇보다도 아동을 연령에 맞춰 분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령에 따라 학급을 분류하고, 각 학급의 단계에 맞는 발달목표도 제시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같은 연령대의 아동들이 반드시 같은 학급에 속해 동일한 발달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근대교육의 근본원리는 무모하고 성급한 일반화다.

사실 근대 이전 문헌에서 각 개인의 연령이 정확히 기록된 경우는 거의 없다. 개인의 나이 따위는 그리 중요한 카테고리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동양에서도 연령은 윤리적 범주였을 뿐, 개인의 아이덴티티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문서에 가장 먼저 나이를 기록해야 한다.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싸움이 일어나도 자신의 나이를 대야 한다. 다들 싸움이 시작되면 그러기 때문이다. “너, 도대체 몇 살이나 먹었어?”

탄생부터 불량했던 ‘질풍노도’ 청소년
근대 이전의 개인은 항상 어떤 집단의 개인이었다. 그러나 단독자로서의 개인은 오직 연령으로 구별됐다. 특히 성인이 되기까지 아동의 아이덴티티는 연령으로 확인됐다. 연령에 따라 모든 상호작용의 내용도 결정됐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아동의 연령구분은 더욱 세분화된다. 아동과 성인 사이에 ‘청소년(靑少年)’이란 또 다른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어의 adolescence 혹은 youth, 독일어로는 Jugend를 번역한 청소년은 청년과 소년의 합성어로, 주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는 ‘청년(靑年)’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일상적인 개념으로는 ‘사춘기(思春期)’ 혹은 ‘청춘(靑春)’ 등이 있다. 인생을 사계에 빗대어 설명하는 중국 고전의 ‘靑春’ ‘朱夏’ ‘白秋’ ‘玄冬’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그러나 봄으로 비유되는 청춘, 혹은 청년의 개념은 서구적 단선론적 발달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겨울이 봄에 비해 더 발달한 상태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동 개념에 이어 청소년 개념을 만들어 심리학의 발달모델에 포함시킨 이는 하버드대 교수를 거쳐 클라크대 학장을 역임한 스탠리 홀이다. 독일 라이프치히대에 유학을 가 심리학의 창시자 빌헬름 분트로부터 발달과 성장이라는 심리학적 근대 이념을 배워 온 홀은 미국 사회에 헤겔의 발생반복설에 근거한 단선론적 발달론을 미국식 ‘발달심리학’의 이름으로 구체화한다.

아동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또한 교화돼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양상은 아주 심각하다. 아동의 개념에는 그래도 ‘사랑스러움’ ‘귀여움’과 같은 긍정적 정서가 동반된다. 실제로도 근대 이후로 성립된 ‘상호 애정과 관심의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표상(social representation)에는 항상 사랑스러운 아동이 부부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한 개념이었다. 청소년의 또 다른 이름 ‘juvenile’은 거의 ‘청소년범죄(juvenile delinquency)’의 축약어로 쓰였다. 홀은 이 청소년기를 ‘질풍노도(Strum und Drang)’의 시기로 명명하며 그 불안정한 특징을 더 노골화했다. 물론 이런 방식의 청소년 개념편집의 사회구조적 필요성은 있었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산업화 때문이다. 일단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산업사회에 필요한 훈련된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규모 도제제도와 같은 교육방식으로는 필요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키워낼 수 없었다. 가족 또한 더 이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전문화된 지식을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가족에서 교육의 기능이 떨어져 나가고, 이 모든 노동력의 교육기능은 학교로 자연스럽게 수렴됐다. 학교는 자신이 담당해야 할 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불안하고, 위험하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의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에서의 청소년 개념도 비슷한 경로로 자리잡게 된다. 1991년 청소년기본법이 제정된 후 청소년지도사·청소년상담사와 같은 자격증이 만들어지고, 이를 위한 전문 교육기관이 대학에 정식으로 설립됐다. 그러나 ‘청소년 지도’ ‘청소년 상담’과 같은 개념은 ‘청소년은 반드시 지도와 상담이 필요한 불안한 존재’라는 근대적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은 항상 ‘비행-청소년’ 아니면 ‘청소년-문제’로만 편집되는 것이다.

아동과 청소년의 개념적 편집은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또다시 집단화돼 분류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근대적 주체가 그 산업사회적 존재양식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객체화라는 소외(Entfremdung)현상을 동반하듯, 근대적 개인은 각 연령에 따라 아동·청소년과 같은 각 발달단계로 귀속돼 또 다른 집단적 아이덴티티를 얻게 된 것이다.

이제 21세기 들어서는 또 다른 연령대의 개인이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이다. 이제까지 발달은 성인이 되면 완성됐다. 성인이 돼 생산활동을 하다 은퇴하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은퇴한 이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개인의 발달이 성인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편집의 내적 필연성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다 아주 ‘성질 고약한 노인네’가 되기 때문이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는 비행청소년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래서 요즘의 발달심리학에서는 ‘전생애발달(life-span-development)’을 이야기한다. 죽을 때까지 발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근대 이후 생겨난 ‘개인’은 각 시대적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편집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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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entebru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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