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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간 아빠들 … 서울 반포중 아버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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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달려라, 달려” “패스, 패스” 폭염이 쏟아진 지난 23일 한낮, 서울 서초구 반포중 운동장은 폭염보다 뜨거운 응원 소리로 가득 찼다. 시험기간을 일주일 앞둔 아이들도 아빠들과 선생님들 간의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반포중 아버지회와 교사들이 오랜만에 모여 학생 교육을 위한 친목을 다졌다. 아이들 교육은 물론 학교생활까지 참여해 학교·아이와 함께 교육경험을 나누고 있는 아빠들을 만나봤다.

김소엽 기자

반포중학교의 아빠와 함께하는 체육대회. 반포중은 학생·교사·학부모가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학교를 소통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출근하듯 학교에 오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좋아하고 공통된 대화를 나눌 이웃사촌도 있고, 선생님들께 학교 교육에 대한 정보도 듣고 장점이 많죠.”

반포중 아버지회 회장 현진(45·2학년 학부모)씨는 아버지회 모임 후 제일 달라진 점으로 “삶의 영역에 아이의 학교가 자리 잡게 된 점”을 꼽았다. 처음에는 ‘무슨 아빠가 학교에 가느냐’고 생각했지만, 막상 학교에 오고 보니 아빠들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았다. 현씨는 “체육대회·밤샘독서캠프·산행을 비롯해 아빠 교육, 화장실 청소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는 중”이라며 “사춘기 아이들에게 아빠의 역할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제일”이라고 설명했다. 무작정 대화를 시도하거나 관심을 갖는 것은 자칫 잔소리나 부담으로 작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1대1이 아닌 학교라는 공간에서 여러 아빠들과 함께 조금씩 아이들 곁으로 다가서기로 했다.

화장실 예절 훈계 대신 교사와 청소하며 본 보여

안재홍(45·2학년 학부모)씨는 “특히 남자아이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상은 가부장적인 억압의 존재일 수 있다”며 “화장실 청소며 학교에서 있는 소소한 일들에 아빠가 참여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빠를 가깝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화장실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택한 방법도 독특하다. 아이들에게 깨끗이 사용하라는 훈계 대신, 교사와 아빠들이 함께 청소하며 본보기를 보인다. 도원수(43·1학년 학부모)씨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소통이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자식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있지만 자연스러운 소통이 가장 고민일 것”이라며 “그런 고민을 아이와 나누는 것은 서로 부담이다.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씩 다가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소통 방식”이라고 체험을 전했다.

실제로 화장실 청소 후, 학교 화장실 문화에 작은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낙서 천지이던 곳에서 더 이상 낙서를 찾을 수 없게 됐고 휴지가 범람하던 휴지통 주변은 말끔해졌다. 오경희 주무부장 교사는 “아이들의 변화는 학교 곳곳에서 아주 작게 시작되고 있다”며 “청소년기 아이들은 작은 관심에 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때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주중에 근무하고 휴일까지 반납하려면 아빠들도 부담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기회들을 자꾸 미루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훌쩍 아빠의 키를 넘겨 사회로 달아난다. 아빠들은 아이들이 더 커서 부모의 곁을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소중한 시간을 나누고 싶다. 사춘기가 된 아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

 “아버지회 가입 권유는 오히려 아내에게 받았다”는 이철진(43·1학년 학부모)씨는 매스컴에서도 아빠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자주 다루지 않느냐”며 “생각보다 많은 아빠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고, 조금 더 아이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아이에게 갑자기 다가서기보다는 학교 일에 함께 참여하며 조금씩 친해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아빠들의 행동은 교사들의 생각도 바꿔놓았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이자 반포중 교사인 양귀승 교사는 “우리 학교 아버지회를 보며 많은 것을 느낀다. 조금씩 변화하는 제자들의 생활 태도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할 정도”라며 “아빠가 변화하니 아이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했다. 같은 아빠로서 조금 더 아이들과 시간을 나누고 싶은 욕심도 생겼고 학교에서는 아버지회 못지않게 아이들을 위해 뛰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의가 생겼다”고 말했다.

야간 순회봉사 나서 주변 청소년에도 관심

폭염에 서 있기도 힘들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란 것만으로 연신 싱글벙글이다.

과거에는 학부모 모임에 대한 이미지가 치맛바람이나 바짓바람으로 불렸다.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학부모 모임을 기피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구청이나 교육청의 지원으로 부담 없이 활동할 수 있다. 이병철(43·2학년 학부모)씨는 “아빠들의 경우 학교에 와서 힘이 필요한 곳에 힘을 쓰고, 운동과 산행처럼 활동적인 일에는 끈기를 보이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은 따라 배운다”고 말했다. “학교라는 장소에서 내 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버지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학교 주변 야간순회 봉사활동도 마찬가지다. 내 아이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우리 주변 모든 청소년으로 확장됐다. 동네 우범지역이나 비행청소년을 보면 다른 학교 학생이라도 언제든 달려가 도움을 준다. 현진씨는 “비록 내 아이로부터 시작되지만 이런 관심이 점점 커져서 사회로 확장되는 것 같다”며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청소년 문제들도 우리 어른들이 내 아이의 일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갖는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뛴 아빠들의 얼굴은 너나 할 것 없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땀범벅에 탈진한 상태였지만, 아이도 아빠도 교사들도 “오랜만에 재밌는 경기를 했고, 몸으로 부딪치며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며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장경순 교장은 “10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와의 소통과 관심이다. 아이가 가정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무르는 곳이 바로 학교”라고 말했다. “학교라는 공간으로 직접 들어와 아이들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함께 생활하는 교사들의 생각이나 교육 정보를 교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며 “더 많은 아빠들이 학교에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학교 2학년 안경섭군은 “시험기간이지만, 아빠들이 학교에 오셔서 뭔가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며 “오랜만에 운동도 하고 아빠와 선생님들과 즐겁게 웃었다.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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