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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플뢰르 회의’와 경제·사회 갈등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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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은 오랫동안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인종차별 정책으로 악명 높았다. 인구의 16%에 불과한 백인이 모든 특권을 누리며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억압했다. 흑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 백인 정부는 마침내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선언한다. 그러나 인종차별 정책이 철폐된 이후에도 흑백 간 갈등은 심각했고 언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계속됐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할 것인가, 공멸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몽플뢰르(Mont Fleur) 회의가 개최된다. 케이프타운 외곽에 위치한 몽플뢰르 콘퍼런스센터에서 남아공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토론을 시작한 것이다. 회의에는 백인 단체, 백인 기업인을 비롯해 흑인 정당, 유색인 반(反)정부단체, 노동조합 등 남아공에서 영향력을 가진 2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네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각 시나리오는 새(鳥)로 표현된다. 먼저 타조 시나리오. 백인 정부가 타조처럼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흑인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은 레임덕 시나리오. 약체 정부가 들어서서 여러 세력의 눈치만 볼 뿐 어떤 개혁도 이루지 못하리란 예측이다. 그 다음은 이카로스 시나리오. 흑인들이 권력을 쟁취하여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추진하지만 태양 가까이 날다 떨어져 죽는 이카로스처럼 결국 실패하리란 전망이다. 마지막으로 플라밍고의 비행 시나리오. 모든 인종과 세력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연합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각본이다.

 몽플뢰르 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은 이런 시나리오를 팸플릿으로 제작해 배포했다. 또 100여 차례의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국민과 대화에 나섰다. 그 결과 남아공 국민들은 ‘플라밍고의 비행 시나리오’를 국가의 미래로 선택한다. 이에 따라 94년 흑인과 백인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한 자유총선거가 실시되고, 이렇게 구성된 다인종 의회는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이후 만델라가 이끄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정부는 급진적이 아닌 온건한 개혁을 통해 흑백이 공존하는 사회를 건설해 나간다.

 우리나라는 물론 남아공과 사정이 다르다. 단일민족국가로 살아왔기에 공동체의 동질성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유사 이래 가장 국력이 강성하다는 지금, 오히려 국민 통합이 시대적 과제가 되고 있다. 국가공동체의 균열이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랫동안 지역 간, 보수·진보 간 갈등이 깊어져 왔다. 최근 들어서는 세대 간에 성향이나 의견 차이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복지냐 성장이냐의 논쟁과 함께 부자와 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 기업주와 근로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심지어 대형마트와 재래시장까지 이해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증폭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무상급식 투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논쟁거리가 있을 때마다 찬반 입장이 극단으로 갈려 대립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대안을 모색하는 진지한 노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올해 선거의 해를 맞아 이런 분열상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특히 정치권이 포퓰리즘으로 흐를 경우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이 더욱 확산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반(反)기업정서를 부추기는 대기업 때리기나 경제민주화 주장, 재정건전성을 위태롭게 하는 복지공약, 노동계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는 노동법안 등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는 마치 몽플뢰르 회의의 ‘이카로스 시나리오’와 같아 언뜻 이상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패나 부작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국내 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사회갈등이 심한 나라라고 한다. 인종 차이나 소득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요인은 상대적으로 미미하지만, 갈등을 관리하는 리더십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절차를 거친 결정에는 승복하는 문화, 그리고 이를 이뤄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남아공은 신흥경제 5개국인 브릭스(BRICS)의 일원으로 90년대 후반부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10년에는 월드컵 대회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모두 ‘플라밍고의 비행 시나리오’를 채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록 지금 우리나라가 남아공과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갈등과 분열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몽플뢰르 회의의 교훈은 새겨볼 만하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