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 첫사랑에 빠진 동주 “뭘까, 이 꾸역꾸역 물컹한 감정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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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멍청한 편지가!
황선미 글, 노인경 그림
시공주니어
112쪽, 9000원

첫사랑의 색깔은 제각각이다. 단언컨대 이 책에 그려진 첫사랑의 명도와 채도는 그 어떤 첫사랑보다도 높다. 한자릿수를 넘어 두자릿수의 나이에 들어선 동주의 머리속에는 첫사랑이란 단어 자체가 없다. 그렇지만 나이 불문,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불현듯 찾아 드는 법이다.

 동주가 사랑에 말려든 건 수취인을 잘못 찾아 든 ‘멍청한 편지’ 탓이다. 동주의 유치원 동창으로 호진을 ‘찍은’ 영서가 동주의 가방에 잘못 넣은 연애편지 말이다. 호진이의 가방과 모양이 똑같아 생긴 ‘배달사고’다.

 이 편지가 날아든 뒤 동주의 일상은 뒤죽박죽이 된다. 곧 아프리카로 떠날 영서를 위해 호진에게 몰래 편지를 전하려다 실패하고, ‘어린이날 축구시합’을 둘러싼 호진과 영서의 갈등이 커지며 동주는 더 심란해진다.

 게다가 동주의 눈에 영서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유치원 때 동주는 울보에 오줌싸개였던 영서를 지켜주는 ‘꼬마 신사’였다. 그런데 꼬맹이로만 여겼던 영서가 소녀가 됐다는 걸 깨닫게 되고 호진이를 좋아하는 영서의 모습이 눈에 거슬리고 짜증까지 난다.

 하지만 축구시합에서 골키퍼를 맡은 동주에게 패널티킥을 차게 된 영서가 ‘나는 널 믿는다’는 둘만의 오래된 신호를 보내고, 공을 온몸으로 막아낸 뒤 기절한 동주의 머릿속에는 영서의 신호가 맴돈다. “이렇게 이상한 느낌은 처음이다. 정말 싫다. 짜증난다. 마음이라는 것도 모양이 있을까. 그건 물컹할까. 그런가 보다. 내 속에서 꾸역꾸역 물컹한 게 생겨나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삼키고 또 삼켜도 목에 달라붙어 나를 답답하게 했다. 열이 나는 것 같고, 울고 싶고.”

 분명 첫사랑에 빠진 동주. 아프리카로 떠나는 영서에게 선물을 건네고 영서는 동주의 이마에 뽀뽀를 해준다. 홀로 남은 동주는 “속에서 물컹한 게 꾸역꾸역 올라와 목에 걸렸다. 그걸 삼키는 데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고 말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작가인 저자는 아릿한 첫사랑의 순간을 그려내며 노련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성을 사랑하는 아주 놀랍고 어여쁜 순간, 아이들은 성장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동주는 멋진 어른이 되는 한 발을 내디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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