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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나온 군인,각오편지 썼는데…1년뒤 '깜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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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울 화곡동에 사는 김종식(41)씨 집 냉장고엔 세 통의 편지가 붙어 있다. 이 편지들은 2010년 8월 김씨 가족이 인천 영종대교 기념관에 갔을 때 ‘느린 우체통’에 넣은 것이다. 이후 꼬박 1년 만인 지난해 8월 김씨 집에 배달됐다. 김씨의 부인 김혜영(41)씨는 “편지를 부친 일을 잊고 있었는데 막상 받아보니 너무 기뻐서 두고두고 읽고 있다”고 말했다.
‘느린 우체통’은 말 그대로 부친 편지를 늦게 배달해준다. 뭐든지 빠른 게 대세인 요즘이지만 이 우체통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2009년 5월 만든 영종대교 느린 우체통에는 지난달까지 4만6400통의 편지가 모였다. 서울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느린 우체통은 올해 4월 생긴 뒤 두 달 만에 900통 가까운 편지가 쌓였다. 이 밖에 ‘슬로시티’로 유명한 전남 완도군 청산도 범바위, 경부고속도로 청원(서울 방향)휴게소, 경남 거제시 거제해양파크에서도 느린 우체통이 운영되고 있다. 요금은 무료이거나 엽서값 정도(1000원 이하)만 받는다. 북악스카이웨이의 경우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인쇄해 엽서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3000원을 받는다.

 느린 우체통은 지식경제부 산하 우정사업본부의 정식 우체통은 아니다. ㈜신공항하이웨이 등 업체들이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만든 것이다. 업체가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가 1년 후 인근 우체국을 통해 배달하는 방식이다.

 이용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영종대교 느린 우체통을 이용했던 김현중(27)씨는 “군 시절 휴가 때 전역 이후의 각오를 담아 내 앞으로 편지를 부쳤다.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지내다 편지를 읽어보니 그때의 각오를 되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청원휴게소 관계자는 “편지를 받고 ‘고맙다’며 답장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편지를 또 부치러 일부러 서울에서 여기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서강대 전상진(사회학) 교수는 “느린 우체통은 1990년대 학번을 그린 영화 ‘건축학개론’이 큰 인기를 얻고 일기나 사진을 보며 위안을 얻는 모습과 닮았다”며 “인터넷·SNS 등에 휩쓸려 잊게 되는 소중한 것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이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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