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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택권 늘어” vs “환자 부담 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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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18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국가유공자 요건 비해당 결정사건’과 ‘임의 비급여 사건’ 등 전원합의체 선고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대법원이 임의 비급여를 제한적으로 허용한 것은 절묘한 선택으로 평가된다. 1, 2심대로 전면 허용하면 건강보험 제도가 무너질 우려가 있고, 기존 판례대로 불법으로 내버려두면 환자·의사의 선택권이 여전히 제한돼 ‘중간지점’을 골랐다. 대법원 관계자는 “의학적 필요에 의한 임의 비급여는 예외적으로 인정하되, 병원이 의도적으로 보험이 안 되는 진료행위를 해 과다한 돈을 챙기는 부작용을 막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한쪽에선 나날이 발전하는 의료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사실상 임의 비급여 문을 열어 줘 불필요한 의료행위와 환자 부담이 증가할 것을 걱정한다.

 임의 비급여라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건보를 적용하는 급여, 환자가 부담하는 비급여밖에 없다. 여기에 들려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약이나 치료재료는 식품의약품안전청 허가(안전성·유효성 평가)를 받은 뒤 약값에 비해 효과가 높으면 급여, 그렇지 않으면 비급여가 된다. 의료행위도 비슷한 절차를 거친다. 급여나 비급여에 들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 이게 임의 비급여이며 불법이다. 의사가 마음대로 한다는 의미다.

 너무 엄격하다 보니 의사들의 불만이 많았다. 임상 경험이나 외국 논문을 토대로 약이나 치료재료의 대상질환이나 사용법을 창조적으로 변형해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데 이게 불가능해지고 의사의 자율권과 환자의 선택권에 제한을 받는다고 주장해왔다. 가령 네오플라틴이라는 항암제는 식약청에서 진행성 상피성 난소암과 소세포 폐암에만 쓰도록 허가받은 약이다. 여의도성모병원은 이 약을 비호지킨림프종에 썼다가 임의 비급여로 몰렸다. 벨케이드라는 항암제는 다른 항암제를 쓰다 안 들으면 주사하는 2차 약으로 허가받았는데 처음부터(1차 약) 썼다.

 요즘에는 좋은 항암제가 쏟아진다. 시판 후 의사들이 다른 약과 섞어 쓰거나 다른 암 치료에 쓰면서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 국내 암 전문의들의 실력이 좋아지면서 이런 시도가 줄을 잇는다. 불만이 폭주하자 복지부가 숨통을 약간 텄다. 항암제는 2006년, 그 외 약은 2008년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련 위원회에 근거를 제시하면 다른 데에도 쓸 수 있게 했다. 항암제는 1347건, 그 외 약은 256건이 통과했다. 하지만 희귀 암 같은 경우 근거를 찾기 쉽지 않아 햇빛을 보기 어려웠다.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로 허가받은 글리벡은 기스트(위장간 기질종양)라는 희귀 암에 쓰는 데 수년 걸렸다.

 서울대병원 허대석(혈액종양내과) 교수는 “그동안 제도가 의료 현장의 변화를 현실을 따라오지 못했는데 대법원이 이를 반영한 것은 긍정적”이라며 “판례를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예: 한시적 조건부 급여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의 악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대법원이 의학적 필요성과 환자의 동의를 충족해야 한다고 전제했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의료 지식이 없는 환자, 특히 말기 환자의 경우 의사가 임의 비급여를 제안하더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대 의대 권용진(의료정책실) 교수는 “의학적 필요성은 의사가 입증하기 나름이라 대법원의 전제 요건이 별개 아닐 수 있다. 불필요한 임의 비급여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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