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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영화 낚시] '번지점프를 하다'

중앙일보

입력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엇갈리지 않고 오다가다 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

멜로는 시간, 공간, 벡터(방향),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물리적으로 달라야 성립한다. '그는 나를 오래 전부터 사랑해왔지만 나는 그가 떠난 후에야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면 그건 시간의 엇갈림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너무 멀리 있다' 혹은 '죽어있다' 면 그건 공간의 엇갈림이다.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만날듯 만날듯 하면서 만나지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 그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거 왠만하면 좀 만나게 해주지. 이런 생각이 절로 들어야 멜로는 굴러간다.

벡터가 엇갈리는 사랑도 시간과 공간이 엇갈리는 사랑만큼이나 서글프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그녀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즉, 시선의 방향이 다를 때, 우리의 안타까움은 배가된다. 이 '벡터의 엇갈림' 을 다른 말로 하자면 삼각관계일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같은 시간과 같은 벡터를 공유하고 있었지만 같은 공간 안에는 머무를 수 없었다. 그들의 공간은 무덤 속에서 비로소 일치한다.

성춘향과 이몽룡은 공간이 달라 괴롭다. 사랑하는 낭군은 한양에 있는데 아리따운 춘향은 포악한 변학도가 지배하는 남원에 있다는 것. 이게 그들 괴로움의 원천이다. 물론 이 상태는 이몽룡이 다시 돌아옴으로써 해소된다.

'번지점프를 하다' 에선 이러한 엇갈림이 영화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선 인우와 태희는 죽음으로써 한 번 엇갈린다. 그야말로 고전적인 기다림의 장소인 입영열차 앞에서 말이다.

독특한 방식의 엇갈림도 있다. 고등학교 선생인 인우와 학생인 현빈의 엇갈림이다. 이들은 같은 시간(2000년), 같은 공간(학교)에 있지만 시선의 방향(벡터)이 완전히 다르며 일치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들은 동성이며 또한 사제지간이다. 게다가 인우는 유부남이다. 그러나 인우는 현빈이 죽은 태희의 현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혹은 '엇갈림' 이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 연료다.

다시 말해, 2000년 현재, 인우와 죽은 애인 태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엇갈리고 있으며, 인우와 제자 태희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인우를 중심으로 한 이 불안한 엇갈림들은 제자인 태희가 인우의 사랑을 승인함으로써 해소된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현생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름하여 줄 없는 번지점프! '번지점프를 하다' 는 죽음과 성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방식의 엇갈림을 한국 멜로영화사에 편입시켰다. 혹시, 이제 멜로에서 써먹을 수 있는 엇갈림은 누군가 다 써먹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영화를 보실 필요가 있다.

멜로는 정말이지 영원히 새로운, 기묘한 장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 영화가 보여준 그 새로움과 기묘함은 게이문화와 동양적 사생관이라는 대단히 이질적인 요소들을 상업 영화라는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 제작자들의 용감함에서 기인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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