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불교적 사고에서 모티브를 찾은 독특한 멜로

중앙일보

입력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지금은 먼 곳에 있어 볼 수 조차 없지만…. 1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그는 그녀를 다시 본다.

풋내기 국문과 대학생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된 후 열 일곱 남학생 제자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눈을 감은 채 어딘가로 급전직하한 번지점프의 기억처럼 아련하고 혼돈스럽기만 하다.

'번지점프를 하다' (김대승 감독) 는 윤회라는 불교적 사고에서 모티브를 찾은 독특한 멜로다.

흔한 멜로 영화에서 보여줬던 통속적인 첫사랑 이야기에 묘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솔 메이트(Sole Mate) 란 소재를 덧입혀 '멜로 아닌 멜로' 로 점프를 시도하는 영화다.

여기서 솔 메이트란 몇 번의 생을 반복해도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이어가는 동반자를 말한다.

최근 마치 유행처럼 쏟아져 나온 한국 멜로 영화들에게 '번지점프…' 는 '아무리 멜로라도 이 정도는 이야기를 비틀어야 되지 않겠느냐' 는 충고라도 하듯 돋보이는 극적 장치를 선보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1983년 여름, 버스를 기다리던 인우(이병헌) 의 우산 속으로 태희(이은주) 가 뛰어든다.

한 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인우의 의지는 단번에 날아가버리고 어느새 그는 우산을 든 채 매일 버스 정류장을 맴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인우가 입영열차를 타던 날, 얄궂은 운명은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고 만다.

2000년 봄. 첫사랑을 추억으로 남긴 채 인우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황당하게도 담임을 맡은 반에서 마주친 열 일곱 남학생 현빈(여현수) 에게서 자꾸 태희의 자취를 발견하게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우는 그가 태희였음을 확신하게 되는데….

사랑하는 이가 다음 생에서 자신과 똑같은 성(性) 으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이 영화는 한때 동성애 영화가 아닌가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력이 터무니 없을 정도의 이야기에 부여하는 질펀한 사실감을 느끼고 난다면 동성애 논란은 지엽적인 단애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훌쩍 커버린 연기자 이병헌이 달콤한 사랑과 쓰디쓴 사랑을 오가며 한층 성숙된 면모를 보이고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에서 빛을 발한 이은주도 제 몫을 다한다.

인우의 친구 역을 맡은 이범수의 코믹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다.

80년대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자동차 10년 타기 운동본부' 에서 빌린 포니.스텔라 자동차와 당시 공중전화 박스 등이 향수를 일으킬 만하고 헬리콥터로 뉴질랜드 계곡을 누비며 촬영한 시작과 끝 장면은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기 위한 제작진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인우가 학생들에게 동성애자라고 비난을 받으며 학교를 그만두는 과정이 좀 허술해보이고 초반부 상투적인 연애담은 생을 반복해도 변하지 않는 그들의 사랑을 그려내는데는 충분하지 못해 아쉽다.

'서편제' 이후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로 있다 데뷔작을 낸 김대승 감독은 성공적인 출발을 한 것으로 인정받을만 하다. 3일 개봉.

-Note-

천 명이 보면 천가지 사랑을 떠올리는 영화라 할만하다.

"운명적인 연애담이군" , "윤회나 전생 이야기로 봐야지" , 아니면 "동성애 영화 아냐" 라며 화들짝 놀라는 사람까지. 물론 받아들이는 감정은 나름일 터. 그러나 꼭 곱씹어 봐야 할 질문은 이런 거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나도 또 사랑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