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꽁꽁 얼어붙은' 은행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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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이라도 건지려면 기업에 함부로 대출해 주지 말라. " "감독기관이나 상부의 지시는 문서로 받아라. " "민감한 지시사항은 녹음해 근거를 갖고 있어라. "

최근 은행 직원들 사이에 나도는 말이다.

예금보험공사가 부실금융기관 임직원의 재산에 대해 압류 조치를 하고 공적자금 투입은행 임직원들에게 경영개선계획을 책임지고 이행하라는 각서를 요구하자 기업 대출을 기피하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면서 이런 말까지 등장했다.

특히 금감원이 1인당 영업이익,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등 경영지표를 우량은행 수준으로 요구하자 일부 공적자금 투입은행 임직원들은 "너무 무리하게 밀어붙인다" 며 반발하는가 하면, 금리가 낮아진 가운데 역마진을 보더라도 떼일 염려가 없는 국고채 투자에 매달리는 등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다.

서울은행의 경우 올해 말까지 1인당 영업이익 2억원, 내년엔 2억3천만원을 달성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정상적인 영업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수치로 은행 내부에서 판단하고 있다.

서울은행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이런 목표는 큰 기업 하나만 넘어가도 달성할 수 없다" 면서 "영업이익을 높이려면 신규 여신은 가급적 피하고 기존 여신은 기회만 있으면 회수할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지만 예보가 지난해 말 금융기관 임직원들을 상대로 6천7백억원의 재산을 가압류한 것도 은행 임직원들의 심리를 얼어붙게 했다.

예보는 일단 경기.동화은행 등 퇴출은행 임직원을 대상으로 재산을 가압류했지만, 앞으로는 공적자금 투입은행에도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계획이다.

이를 의식한 공적자금 투입은행 임직원들은 신규 대출 결정을 내리지 않는데다 전임자가 결정한 기존 대출에 대해서도 만기 연장이나 대환(貸換)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말 은행들은 기업 대출을 무차별적으로 회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권의 대기업 대출금은 지난해 11월 1천3백91억원, 12월 3조4천8백63억원이 줄었다.

중소기업 대출도 11월에는 9천4백60억원 늘었다가 12월에 4천7백57억원 감소로 반전했다.

윗선에서 부탁하는 대출건도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우려가 있으면 거부하거나 나중에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공식 문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이나 은행 임원의 전화 지시사항을 녹음해 보관하는 직원들도 있다.

또 예보의 부실 금융기관 임직원 재산 가압류 조치에 대비해 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옮기거나 은행 예금을 다른 금융기관에 제3자 명의로 바꿔 예금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재산 가압류에 압박을 느낀 일부 직원들이 재산을 남의 명의로 돌려놓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며 "대출 과정에 하자나 중대한 과실이 없다면 책임을 물어서는 곤란하다" 고 주장했다.

한편 예보는 은행원들이 지나치게 위축돼 기업 대출을 꺼리는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갖고 부실 금융기관 임직원의 처벌 범위 등에 대해 설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박시호 조사1부장은 "은행법이나 금감원 지침 등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단순한 판단 잘못으로 은행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는 없다" 면서 "설령 이사회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부실이 생겼다 할지라도 당시 반대를 한 임원들은 처벌을 하지 않으므로 소신있게 의사 표현을 해야 한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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