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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회·북풍회 ‘아서원’서 조선공산당 결성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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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26면

1925년 4월 전조선기자대회가 열렸던 수운회관. 이 행사는 조선공산당 창당 날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1925년 4월. 일제 경찰(日警)은 정신 없었다. 4월 15∼17일 ‘조선기자대회’가 열릴 예정인 데다, 20일부터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24년 1월 출옥한 박헌영·임원근·김단야가 동아·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자들 중에는 이른바 ‘주의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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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수운회관)에서 열린 ‘조선기자대회’는 1921년 한인 기자들이 조직한 무명회(無名會)가 주최한 것으로, 당초 2월에 열기로 했다가 4월로 연기된 행사였다. 연기 이유는 조선공산당 창당 날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기자대회 마지막 날인 17일에는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서 간친회가 열렸는데 일경의 시선은 각종 언론 대표 693명이 모인 기자대회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상춘원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3·1운동을 기획한 곳이기도 했다.

일경은 조선기자대회 행사가 별일 없이 끝난 데 안도할 사이도 없이 4월 20일부터 시내 장곡천정(長谷川町)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이하 민중대회)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4월 18일까지 민중대회에 참가 의사를 밝힌 단체 수는 노농단체 263개, 청년단체 100여 개, 백정 등 신분 해방 단체인 형평단체 18개, 사상단체 44개 등 도합 425개나 되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서울청년회 계열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샀다. 민중대회 배후에 화요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청년회는 1925년 4월 7일 서대문 한성강습원(漢城講習院)에서 230여 개 단체가 모여 ‘전국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전국연합회(이하 연합회)’를 결성했다. 연합회는 결의문에서 “화요회 일파가 주최하는 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그 소집 시기와 방법, 주최의 동기로 보아서 운동선(線)을 규란(糾亂)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반대 대회를 개최한다”고 결의했다. 민중대회가 조선 민중의 투쟁 역량을 나누어 결과적으로 일제를 이롭게 한다는 논리였다.

1 서울 낙원동 민중대회 준비회 앞. 일제가 교통까지 막고 민중대회를 금지시킨 데 대해 관련자들이 항의하고 있다. 2 기자간친회가 열렸던 상춘원. 일경의 시선이 상춘원에 쏠린 틈을 타서 화요회는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연합회는 조선 사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을 분규와 혼란으로 규정짓고 그 원인은 “화요회 일파, 해외에 있는 전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 일파의 수령(首領) 등에 있다”면서 “아등(我等)은 조선운동전선의 통일과 정의를 위해서 화요회 일파 및 전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 수령 등을 철저히 구축하겠다”고 결의했다. 서울청년회는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가 자파의 세력 확장을 위해 국내 운동선을 분열시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연합회는 화요회 일파의 죄악서(罪惡書)를 작성해 발표하고, 화요회 성토 전국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목할 것은 서울청년회에서 화요회의 뿌리인 이르쿠츠크파뿐만 아니라 상해파도 격렬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결의문은 ‘해외에 있는 상해파 및 이르쿠츠크파 수령’ 등에 대해서 ‘저들이 조선운동선상에서 범한 상세한 죄악서를 발표하되 특히 흑하사정(黑河事情: 자유시 참변)과 40만원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적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르쿠츠크파에 대해서는 독립군을 무차별 학살한 자유시 참변의 책임을 묻고, 상해파에 대해서는 레닌 자금 횡령 사건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요회에 대한 서울파의 공세는 일제가 18일 밤 11시쯤 돌연 민중대회 불허를 통보하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로 옮겨갔다. 19일 아침 민중대회 관계자들은 낙원동 대회준비회로 몰려들었으나 일경에 의해 해산되었다. 일경은 준비회 정문과 집안 곳곳에 정·사복 경찰들을 배치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봉쇄했다. 그러자 민중대회 관계자 300여 명이 오후 3시쯤 낙원동 파고다 공원으로 몰려들었지만 다시 일경에 의해 공원 밖으로 쫓겨났다. 밤 9시쯤에는 종로 2가 단성사와 우미관 앞에 2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붉은 기 5개를 들고 ‘전조선 민중운동자 대회 만세!’ ‘무산자 만세!’라고 외치며 종로 3가 방향으로 진행했다.

가두시위에 야시(夜市)에 나왔던 수천 명의 군중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깃발 중에는 ‘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항하자!’라는 내용도 있었다. 종로경찰서의 송천(松川) 경부보는 예비경비대와 사복 경관, 기마경찰대 등 50여 명을 출동시켜 진압했다. 동아일보(1925년 4월 22일)는 ‘시위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론 거리에 번적거리는 사람은 부인만 빼놓고는 누구든지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구타를 하는 등 극히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밤 10시쯤에야 단성사 앞에서 시위 군중을 겨우 해산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저항은 격렬했다.

일경은 시위 광경을 촬영하던 시대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부수거나 구타하고 사진을 압수해 언론계와 법조계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일경은 마산청년회원 김상주(金尙珠), 대구청년회원 신철수(申哲洙), 서울청년회원 정용석(鄭溶錫), 신흥청년동맹회원 김창준(金昌俊) 등 주모자 15명을 체포했다. 이 중 마산청년회원 김상주는 이틀 전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시위를 조직한 세력이었다. 조선기자대회와 민중대회는 화요회가 조선공산당 창당 움직임에 쏠릴 일제의 정보망을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경의 눈이 기자간친회가 열리는 상춘원에 쏠려 있던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서울 황금정(을지로)의 중국음식점 아서원(雅<53D9>園) 2층 방에 20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김재봉·김찬(김낙준)과 김약수, 윤덕병, 조봉암, 조동호(趙東祐:조동우), 송봉우, 유진희, 독고전 등이었다.

겉으로는 주연(酒宴)을 가장했지만 코민테른 파견원 김재봉이 ‘오늘의 집회 목적은 공산당 조직을 논의하는 데 있다’는 개회 선언을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공산당 결성을 위한 것이었다. 김약수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지방 대표들의 현지정세 보고 때 신의주 대표 독고전(獨孤佺)은 ‘국경 지방의 사상 동향이 사회주의자들에게 고무적이다’고 보고했고, 이틀 후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되는 마산의 김상주(金尙珠)는 ‘공산주의 사상이 점차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장래가 유망하다’고 보고했다.

이것이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하는 제1차 조선공산당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숱한 파란과 족적을 남긴 조선공산당은 이렇게 출범했다. 이 대회의 의사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내용을 파악하려면 체포되었던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대략 김찬, 조동호, 조봉암 3명을 전형위원으로 선출해 이들에게 중앙집행위원 7명과 중앙검사위원 3명의 선임을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7명의 중앙집행위원은 책임비서 김재봉, 조직부 조동호, 선전부 김찬, 인사부 김약수, 노농부 정운해, 정경부 유진희, 조사부 주종건이었고 중앙검사위원은 윤덕병, 조봉암, 송봉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봉·김찬·조동호·조봉암 등은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인 화요회에 속했고, 김약수·송봉우·정운해는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인 북풍회(북성회) 소속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국내 최대 사회주의 운동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를 배제한 채 화요회와 북풍회가 연합해 결성한 것이었다. 당의 명칭을 고려(高麗)가 아니라 조선(朝鮮)이라고 한 것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악명 높은 파쟁을 연상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파견원들의 계보를 따지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관련자들이므로 이르쿠츠크파가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북풍회의 김약수는 일경에 체포된 후 화요회가 주도한 당 건설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아서원에 모였을 때 최초의 집합인 것처럼 자신에게 보이게 했고, 화요회가 북풍회를 서울청년회와 대립하는 데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은 일종의 장식물로 만들면서 비밀에 속하는 일은 모두 화요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처리했다고도 말했다.

김약수는 민중운동자대회에 소비한 5000여원에 대해서도 진술했는데(金枓佺 外 6人 調書) 결국 코민테른 자금이 유입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책임비서 김재봉과 김찬, 유진희 등은 훗날 일제 신문조서에서 ‘강령, 규약 등을 통과시켜야 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중앙집행위원회에 맡기기로 하고 오후 4시쯤 산회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 창건 대회가 3시간 만에 끝나면서 필수적인 당 강령과 규약도 통과시키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당 강령은 전해지지 않지만 김찬은 일제 신문조서에서 당의 당면 문제 슬로건을 “일본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 8시간 노동제·최저임금제·사회보험제,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평등,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중국 노동혁명 지지·소비에트 연방의 옹호 등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자와 사회투기주의자의 기만을 폭로하자’는 것도 들어 있었다. 이렇게 조선공산당은 결성됐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는 일과 일제의 수사망을 따돌리면서 세력을 확장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