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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당은 때를 기다리는 주체혁명 장교 양성소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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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호 04면

엄익준 국가정보원 2차장이 1999년 9월 9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증거 물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92년 3월 16일 오전 10시. 서울대 공대 뒤의 관악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4ㆍ19 기념탑. 이곳에 김영환ㆍ하영옥과 박모씨 등 법대 출신 세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세 사람은 ‘인간 중심의 주체사상을 지도 사상으로 한다’는 강령을 선언한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주체사상에 기반한 ‘혁명 지하당’이 등장하는 민혁당 창당식이었다.
창당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김영환은 총책, 하영옥은 조직책, 박씨는 선전책으로 역할 분담했다. 민혁당의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의 기관지였던 ‘주체기치’도 창당을 앞두고 온 세상에 빛을 준다는 의미에서 ‘빛’으로 개명했다. 창당을 한 달 앞두고 세 명은 다시 관악산에서 모인다.

92년 ‘주사파 지하당’ 첫 등장

김영환=“구체적인 (준비) 사항은 혁명의 이념에 따르자. 이제 창당식으로 온 세계에 우리의 의지를 알리는 일만 남았다.”

하영옥=“당원 성원과 조직도 모두 준비됐다. 당 지도부는 우리 세 명으로 하자.”
전에도 좌파 지하 조직이 있었지만 민혁당은 달랐다. 이전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지하당이었다면 이젠 처음부터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며 주체사상을 당헌ㆍ강령에 내걸었다.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ㆍ영남위원회ㆍ전북위원회 등 도당을 구축해 전국적 단위로 결성된 점도 과거와 달랐다. 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이 김일성 주석도 “눈이 나빠 글자를 확대해서 봤다”며 감탄했다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이다. 86년 운동권은 지하 문건 한 장으로 충격에 빠진다.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강철서신은 파격적으로 김구를 높게 평가하며 이념적으론 오류가 있지만 인민 대중에게 헌신한 인물로 표현했다. 이게 주체사상에서 얘기하는 품성론이었다.”(신지호 새누리당 의원) 북한의 대남단파방송인 ‘구국의소리’를 듣고 주체사상을 배운 김씨는 ‘솔직ㆍ소박ㆍ겸손’의 품성론과 함께 민족해방ㆍ반미투쟁론으로 자생적 주사파의 불길을 당겼다. 북한이 그를 주목한 이유다. 그런 김영환에게 89년 7월 초 ‘김철수’(남파간첩 윤택림)가 접근했다. 당시 상황을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저서 『진보의 그늘』에서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김철수=“북한에서 왔습니다. 김 선생과 통일사업을 논의하고 싶소.”

김영환=“북한에서 온 걸 어떻게 믿는가.”

김철수=“내일 밤 10시 평양방송(라디오)을 들으면 ‘제가 김 선생에게 메시지를 전했다’는 말이 나올 겁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2년 후인 91년 5월 김영환은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조유식과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탄다. 이어 평양의 모란 초대소에서 두 사람은 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한다. 국정원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묘향산 초대소에서 김씨를 만나 “1000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다음 해 만들어진 민혁당은 주체 혁명을 준비하는 전위대였다. 창당 한 달 후엔 강화군 외포리의 드보크(간첩의 비밀 매설지)에서 40만 달러를 파내 김영환이 민혁당 결성 자금으로 사용했다. 당시 핵심 간부의 얘기다.

-민혁당은 어떤 목적이었나.
“혁명의 준비대다.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이 노출되지 않은 채 유지시키는 게 최대 과제였다. 둘째가 ‘핵심 대열’의 훈련과 확대다. 혁명성의 함양과 혁명 대오의 확장이다. 셋째가 각자의 사업장에서 영향력 확대였다. 선거 등에서 우리가 100명이라면 현실에선 1만 명에게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세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민혁당은 때가 되면 사병을 모아 거사를 일으키기 위한 ‘혁명 장교 양성소’였다.”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당원은 100명 규모였고, 예비대인 준당원이 400명 정도였다. 평소 당원 1명이 예비대 서너 명을 관리한다. 관리 대상을 놓고 ‘1년 후 정도면 당원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수시로 보고서를 올렸다.”

-점조직은 어떻게 운영됐나.
“‘단선연계 복선포치(單線連繫 複線布置, 수직적 단선으로만 알게 해 적발돼도 조직 전체의 노출을 막고 라인을 복수로 만들어 하나가 무너져도 다른 라인은 가동되도록 하는 지하당 조직 방식)’라고 한다. 횡적 연결은 절대 금지했고, 서너 명의 세포 단위에서만 서로 알았다. 세포 모임을 할 때도 참석자 중 한 명이 5분 이상 늦으면 곧바로 해산했다. 적발될 경우에 대비해 항상 ‘추모회 준비’ ‘노동 집회 준비’ 등으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어 입을 맞췄다.”

그에 따르면 민혁당은 ‘동창회’로, 민혁당의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은 ‘동문회’로 불렸다. 세포 내부에서조차 서로를 ‘김 동지’나 ‘김 형’ 등 가명으로 불렀다. 세포에서 관리하는 인물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 때도 특정 프로그램을 통해 암호화했다. 공안기관의 압수에 대비해 보고서는 늘 PC가 아닌 플로피 디스크에만 저장했다.

이 인사는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땐 민혁당 지도부로부터 추모식을 지시받았다. 그는 위치는 얘기하지 않은 채 “산에서 세포 모임을 갖고 묵념한 뒤 서로 추모사를 나눴다”며 “다른 세포들에도 같은 지시가 내려갔을 것”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중앙(당 지도부)’에서 ‘김 주석에게 보내는 글’을 쓰라고 해 세포원 모두가 쓴 적도 있었다. “진짜 북으로 보냈는지 아니면 사상 강화 교육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인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북한을 모델로 삼겠다며 만들어진 민혁당은 주체의 대부 김영환이 북한의 실체를 느끼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91년 그가 경험한 북한은 기대했던 ‘이상 사회’가 아니었다. 김영환과 함께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든 허현준 ‘시대정신’ 사무국장은 김영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체사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평양에서 토론도 하리라 마음먹고 올라갔지만 막상 현지에선 자유롭게 대답도 못하는 분위기였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답하고, 오히려 서로 감시하는 분위기만 느껴졌다. 주체의 핵심인 인간의 창의성은 없고 관료주의만 가득했다. 북한식 사회주의는 문제가 있었다.”
고민하던 김영환은 97년 2월 서울 종로의 한 레스토랑으로 하영옥과 박씨를 모았다. 당시는 이미 민혁당을 떠나 변호사로 활동 중이던 박씨까지 동원, 민혁당 해산에 반대하던 하영옥을 누르고 2대 1로 당의 해체를 결정했다. 그러곤 다음 해 “북한의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선언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민혁당이 완전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98년 12월 18일 새벽 거제도 남쪽 100㎞ 해상에서 북한 반잠수정(5t)이 함포 3발을 맞고 침몰했다. 국방부는 함구했지만 대간첩 작전엔 한미연합사 정보참모부가 참여했다. 다음 해 3월 인양된 침몰선에선 ‘원진우’라는 신분증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구입한 제과점 포장지 등이 나왔다. 수사당국은 관악구 고시촌을 이 잡듯 뒤졌고 봉천동의 한 고시원에서 말레이시아인 진운방으로 위장했던 남파간첩 원진우의 입실 기록을 발견했다. 원진우와 하영옥이 같은 승용차를 탔다가 과속 카메라에 잡힌 사진도 찾아냈다. 수사당국은 민혁당 해체를 거부한 하영옥이 당의 재건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원진우를 만나 밀입북하려 했고 그러다 문제가 생겨 원진우만 귀환하다 침몰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씨 등은 99년 당국의 ‘민혁당 사건’ 발표 뒤 기소된다. 민혁당 연루자엔 현재 통합진보당 갈등의 핵심인 이석기 당선인도 포함됐다. 2002년 서울고법 판결문은 그가 “93년 8월 하영옥을 만나 ‘경기남부위 상반기 사업총화’를 보고했고…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이석기 당선인은 방송에서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북한과 아무런 연계가 없다”며 이를 부인한다. 하영옥씨는 일부 언론이 그를 놓고 민혁당 재건설을 제기하자 “함부로 소설을 쓴다”며 반발했다.

민혁당으로 나타난 주사파의 등장과 확산은 80·90년대 사회주의 퇴조라는 전 세계적 조류를 거꾸로 올라갔던 대한민국만의 현상이었다. 지금도 종북을 놓고 논란은 계속된다. 전향한 운동권 출신 인사는 “과거 종북 인사들은 이제 교육ㆍ노동ㆍ문화예술 등에서 일자리와 돈이 제공되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며 “자기들만의 물적 기반이 만들어졌으니 종북적 사고에서 벗어났더라도 종북의 허상을 고백하기를 꺼린다”고 주장했다. 신지호 의원은 “지금 군부독재로 돌아가자는 우파가 있는가”라며 “우파가 권위주의 군부
독재와 단절한 것처럼 좌파도 종북과 절연해야 진보가 발전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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