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명 희생 日오키나와, '돼지 신세' 자조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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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오키나와(沖繩) 사람은 돼지(豚)입니까’. 오키나와 일본 반환 40주년을 다룬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기획의 제목이다.

 이 표현은 지난해 오키나와현에서 공연된 연극 ‘돼지, 돼지’에서 따왔다. 극중에서 돼지는 인간 사회에 편입돼 끊임없이 놀림당하고 또 무시당한다. 오키나와인들의 애환과 절망을 다룬 이 연극에서 오키나와인들은 인간에게 차별받는 ‘돼지’로, 일본 본토인들은 ‘인간’으로 그려졌다. 자작 희곡을 무대에 올린 오키나와 출신 극단 대표 히가 하루카(比嘉陽花)는 아사히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역시 우리 오키나와인들은 돼지다.”

오키나와 본섬 기노완 시 심장부에 자리 잡은 후텐마 미군기지. 비행장 면적은 4.8㎢로, 기노완 시 전체 면적(19.5㎢)의 약 25%를 차지한다. [중앙포토]<사진크게보기>

 ‘일본의 불편한 진실’ 오키나와가 15일 반환 40주년의 ‘불혹(不惑)’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을 위한 중간거점으로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이때 주민 4명 중 한 명꼴인 15만 명이 희생당했다. 일본 본토는 1951년 미군 통치에서 벗어났지만 오키나와는 그렇지 못했다. ‘소련과 중국에 대항할 미군의 아시아 전초기지’란 전략적 가치 때문에 21년이 더 흘러서야 일본에 반환됐다.

 일본 본토와 대만 사이 동중국 해상의 유인도 49개와 수많은 무인도로 이뤄진 오키나와의 면적은 일본 전체 국토의 0.6%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본 전체 미군 시설의 73.9%가 이곳에 몰려있다. 그래서 ‘오키나와=미군기지’는 일본인들에겐 깨지기 힘든 공식이 됐고, 오키나와는 “왜 우리가 미·일동맹과 일본 방위의 책임을 전부 떠맡아야 하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72년 일본 반환 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는 “오키나와도 일본인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게 됐다”고 말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오키나와인들에겐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한때 대도시 식당 앞에 ‘오키나와인 사절’이란 벽보가 나붙을 정도로 심각했던 차별은 사라졌지만, 오키나와의 현실은 각박하기만 하다. 주민들의 평균소득은 일본 전체 평균의 70%에 불과하고 반대로 정부에 대한 재정의존도는 40%에 달한다.

 15일 오키나와 기노완(宜野彎)시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반환 40주년 기념식 분위기는 비바람이 불어닥친 바깥 날씨만큼이나 우울했다. 최대 현안인 후텐마(普天間) 기지 이전 문제 때문이다. 후텐마 미군기지는 인구 밀집지역인 기노완시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는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있다. 95년 미 해병대원의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미·일 양국은 96년 이 기지의 이전에 합의했다. 그로부터 16년째가 됐지만 아직 제자리걸음이다. 오키나와현 내 헤노코(邊野古)로 기지를 옮기려는 정부 방침에 오키나와현은 “아예 현 밖으로 옮기라”며 결사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다.

 정부의 처신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민주당 정권의 첫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는 2009년 총선 직전 “후텐마를 오키나와 밖으로 옮기겠다”고 약속했다가 총리가 된 뒤엔 약속을 뒤집는 등 허둥대다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5일 반환 기념식에서도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 오키나와지사 간의 입장차는 좁혀들지 않았다.

 이제 후텐마는 허약한 일본 리더십의 속살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상징이 돼버렸고, 그런 사이 오키나와의 불신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올해 오키나와현 대학생들이 과제물로 제출한 ‘오키나와의 미래’ 리포트에서 수강생 20명 전원이 “일본에서 독립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적어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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