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혁의 세상탐사] 1987년 체제의 종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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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호 02면

올해 초부터 진보좌파 진영에선 2013년에 대한 희망찬 얘기가 많았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앞장섰다. 그는 올해 4·11총선과 연말 대선에서 진보가 승리하면 2013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주장했다. 남북연합을 추진하고,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고, 경제민주화가 이뤄지는 세상 말이다.

하지만 백 교수의 주장은 조금만 따져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투성이다. 무엇보다 북한을 좋게만 보려는 분들이 아무리 ‘닥치고 평화’를 외쳐도 북한이 과연 평화집단이 될지가 의문이다. 백 교수의 남북연합 주장이 결국은 북한의 일당독재와 인권유린, 왕조적 세습체제를 보장하려는 나팔소리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보편적 복지 주장에 대해서도 지금 절실한 건 뭘 자꾸 퍼주는 ‘무상’이 아니라 ‘일자리’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재벌 해체의 경우 국민 감정과 정서에는 크게 어필하겠지만 국제사회에 한국의 대표선수로 누굴 내보낼지에 대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

백 교수는 원래는 “4·11총선에서 진보가 패배하면 대선에서 이겨도 2013년 체제는 만들기 힘들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하자 말을 바꿨다. 최근 인터뷰에선 “대선에서만 이기면 그래도 2013년 체제가 가능하다”고 했다.

어차피 개인의 주장에 불과했던 거니 그의 말 바꾸기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올 연말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지 알 수 없으니 2013년 이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백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게 있다. “1987년 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과 시민, 비판적 지식인 그룹이 힘을 합쳐 군사정권의 체육관 선거를 끝내고 대통령 직선제와 개헌을 쟁취해 낸 ‘1987년 체제’는 대한민국 역사의 고귀한 자산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200여 개 국가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국가라는 칭송도 거기서 나왔다. 그때부터 시작해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거나 승계했다. 자랑할 만한 역사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1987년 체제’는 밝기만 한 게 아니다. 어둠도 있다.

우선 이 체제가 상징하는 건 운동과 투쟁이었다. 길거리 시위와는 별개로 심지어 국회에서도 최루탄이 터지고, 해머에 문짝이 부서지고, 신발이 날아 다녔다. 이 체제에선 또 북한에 대한 맹목성과 과도한 민족주의가 압도적이었다. 종북파들은 군사정권의 색깔론에 질려버린 국민 정서를 파고들었다. 그 결과 명백한 간첩 행위를 하다 붙잡혀도 민주투사로 둔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합리와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배했던 것도 이 체제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광우병 쇠고기처럼 수많은 정책 사안에 대해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접근이 국민에게 훨씬 잘 먹혔다.

그 ‘1987년 체제’가 시작된 지 이제 거의 30년이 다 돼간다. 이미 한 세대가 지났을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로 나는 이 체제가 수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북한의 변화다. 북한 3대 세습체제는 이제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더 이상 추종하기 힘들게 됐다. 90년대와 2000년대에 운동권을 휩쓸었던 주체사상도 덩달아 소멸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둘째, 민족주의의 쇠퇴다. 국내에는 이미 150만 명 안팎의 외국인이 살고 있다. 다문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고 단일민족의 신화는 깨져가고 있다. 셋째, 이념의 퇴조와 실용주의의 부상이다. 현재 40대인 386세대와 그들에 의해 영향을 받던 30대를 끝으로 요즘 젊은이들은 이념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개인의 자유고 실용이다. 넷째, 진보 세력의 후진성이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선거 부정이 보여줬듯이 진보그룹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윤리적 우월성이 없다. 시민단체라는 이름의 정치단체들도 거기에 해당된다.

나는 ‘1987년 체제’ 이후의 시대정신이 뭐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과도한 민족주의보다는 보편적 인간애, 감성보다는 이성, 투쟁보다는 타협, 주체사상보다는 북한 인민에 대한 애정이 앞서는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한다. 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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