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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실험, 완장의 공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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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종윤
뉴미디어 에디터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은 죄질이 나쁜 범죄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권력이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우리는 음험한 공포에 가위눌렸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이런 범죄, 뿌리 뽑자는 분위기가 뜨거웠다. 그런데 4·11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한 뒤 단죄 신호가 레이더망에서 흐지부지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국가 권력의 민간인 불법사찰은 언제부턴가 ‘그러려니’ 하면서 무감각하게 통용됐다.

 이런 체념의 배경에는 ‘완장’에 복종하는 인간의 본능이 깔려 있다. 1971년 스탠퍼드대에서 이루어진 인간 심리 변화 관찰실험은 심리학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4명의 지원자를 교도관과 죄수로 나눠 대학 지하의 가짜 교도소에 넣었다. 실험이 시작되자마자 교도관이 된 지원자들은 죄수들에게 가학적 행동을 했다. 맨손으로 변기를 닦게 하고, 심지어 죄수를 성적으로 학대하기도 했다. 죄수가 된 지원자들은 극도의 공포에 짓눌리면서 실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결국 2주로 예정됐던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다.

 실험 상황인데도 이렇게 완장의 힘은 강했다. 현실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분별없이 설친 완장들은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남이냐!”로 시작된다. 대통령과 학연·지연으로 엮인 비선(<7955>線)조직이 충성경쟁을 벌인다. 이들이 찬 완장은 무시무시하다. 대통령을 위한다는 신념과 출세하겠다는 욕심으로 똘똘 뭉쳐 물불 안 가린다. 여기엔 불법과 적법의 경계선이 없다. 갈등은 논공행상을 하면서 폭발한다. 공을 차지하겠다고 서로 물어뜯다 보니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도태된 요원들은 음모를 폭로한다. 이때부터 국민의 분노가 들끓지만 그때뿐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출연진만 바뀔 뿐 구태는 되풀이된다.

 이런 악순환을 끓기 위해서는 결국 국민이 나설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최근 민간사찰방지법을 제정하겠다고 했지만 지금도 법이 없어서 음험한 촉수가 설친 게 아니다. 해법은 의지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후보들은 반드시 두 가지를 국민에게 약속해야 한다. ‘민간인 불법사찰을 하면 대통령직을 내놓겠다’ ‘적법한 감찰을 하는 조직에도 혈연·학연·지연으로 엮인 내 편을 임명하지 않겠다’.

 스탠퍼드대 실험은 사회심리학의 이론 토대를 닦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연구윤리를 어긴 것으로 평가됐다. 이후로는 피실험자에게 고통을 주는 실험은 유의미한 결과가 나와도 좋은 연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제 현실에서 비일비재한 윤리파괴를 종식할 때가 됐다. 완장을 찢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유권자가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