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다른 주문을 외우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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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호 02면

다들 성장에 시큰둥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해 사상 최고인 2만2589달러였는데도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 돈으로 치면 2500만원, 4인 가족으로 따지면 가구당 1억원이다. 대단한 성적인데도 사람들은 예사다. 1만 달러가 외환위기로, 2만 달러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무너졌을 때만 해도 큰일 난 듯 떠들썩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말이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일주일 전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1인당 소득이 4년 뒤 3만 달러를 넘어서고, 5년 뒤엔 구매력 평가기준이긴 하지만 일본을 추월한다고 전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을 앞지른다는 것, 우리 세대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어디 짐작조차 했던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덤덤하다. 수치가 아무리 화려해져도 우리네 삶이 달라진 게 없더라는 자각 때문인 듯싶다. 표 냄새를 좇는 데 귀재인 정치인들이 성장이나 경쟁력이 아닌, 복지와 양극화를 입에 달고 사는 이유다. 확실히 성장은 인기 없는 메뉴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정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은행이 올해 성장률을 3.7%에서 3.5%로 낮췄는데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니 말이다. 당초 예상치 3.7%만 해도 낮은 수치다. 지난해 3.6%였으니 2년 연속 3%대 저성장이다. 이것만 해도 기가 찰 노릇인데, 여기서 더 낮추다니! 예전 같으면 저성장을 타개하기 위한 각종 방안이 쏟아졌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단기적 부양책이 좋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인위적 경기부양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지적하고 싶은 건 저성장이 지속되고, 당초 전망했던 것보다 성장률을 낮추는데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이명박 정부의 자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경제는 ‘수출만이 살길’인 구조다. 수출 의존도가 무려 50%고, 수출의 경제성장 기여율이 무려 150%에 가깝다. 우리나라 성장률이 세계경제의 그것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 이유다. 세계경기야 통제 불가능한 변수니, 올해 우리 경제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정부의 설명은 맞다. 실제로 유럽과 중국 경제는 당초 전망했던 것보다 악화되고 있다. 우리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대(對)중국 수출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1분기 무역흑자도 지난해 동기보다 무려 76%나 감소했다. 한은이 성장 전망치를 낮춘 것도 그래서다. 문제는 이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한 정부의 자세다. 정부는 학자가 아니다. 세계경제가 나빠지니 우리 경제도 나빠진다는 설명은 학자의 몫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저성장을 타개할 근본 대책을 내놓는 게 본연의 사명이다. 과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정부엔 그런 결의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는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유럽 경제위기가 앞으로 5년은 더 간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우리 경제도 향후 5년간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일본식 장기 불황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는 일본이 확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잖아도 저출산·양극화, 낮아지는 잠재성장률, 청년 좌절 등 ‘일본 판박이’라는 얘기가 무성한 터다. 당연히 요즘 화두인 복지와 분배, 양극화 해소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차제에 경제·산업구조를 확 바꾸는 건 어떨까. 제조업 중심의 수출 위주 경제구조를 개편하자는 얘기다. 설령 세계경제가 좋다 해도 이런 구조로는 안 된다는 게 이미 명백해졌다. 제조업 강국만 고수하다간 일자리 창출은커녕 유지조차 어렵다. 제조업의 고용탄력성이 이미 마이너스라서다. 생산이 늘수록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수출도 마찬가지다.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수출로 혜택을 보는 사람이 많은데도 내수는 여전히 부진하고,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주술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거듭 말하지만 제조업과 수출은 우리 경제의 살길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는 의식의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저성장을 타개하기 위한 경제구조의 재편, 그게 정부가 해야 할 본연의 역할이다. 정부는 학자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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