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세돌, 드디어 역전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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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2국
[제10보 (115~129)]
黑 . 왕시 5단 白 . 이세돌 9단

백△의 일격으로 온종일 쌓아올린 흑의 탑이 주르르 허물어지고 있다. 왕시(王檄)는 자신도 모르게 처연한 표정이 되어 이 한 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덧없는 일이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수였는데 아차 하는 순간 당해버렸다. 그토록 조심했건만 오히려 조심이 화근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찰나의 빈틈을 제대로 찔러버린 이세돌 9단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가시덤불을 헤매고 또 헤매다가 어느 날 100년 묵은 산삼을 찾아낸 심마니의 심정이 이럴까.

흑115는 선수. 그러나 여기서 117로 후퇴해야 한다는 게 비극이다. 이 수로 '참고도' 흑1로 잇는 것은 백2, 4, 6으로 타고나와 훨씬 크게 잡히고만다. 그 다음은 쉽다. 118 끊고 119 따낼 때 120으로 잡는 수순….

똑같은 석 점이지만 중앙 백 석 점은 단순히 6집. 좌상 흑 석 점은 20집이 넘는다. 물론 중앙도 두터움까지 계산하면 6집보다야 크겠지만 어쨌든 어마어마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박영훈 9단은 "역전입니다"라고 말한다. 비통한 모습으로 판을 응시하던 왕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판을 살피고 있다. 가장 큰 곳이라면 A로 우변을 키우는 수다. 그러나 격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산서를 뽑아보니 그곳을 두면 진다. 덤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변화를 도모해야 할까. 어디를 두어야 판을 흔들 수 있는 것일까.

좀 전까지만 해도 변화를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던 왕시가 이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처지가 바뀌면 모든 게 변한다. 단 한 수가 왕시의 운명을 기구하게 바꿔놓았다. 123. 우하귀를 역으로 두었다. A로 두면 상대가 이 부근을 둘 것이기에 순서를 바꿔버렸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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