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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사자후·막료·비단바지 … 왕조정치 구태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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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는 ‘헤이샹(黑箱:블랙박스)조작’이라는 말을 듣는다. 무엇이든지 은밀하게 행해져서다. 보시라이 사건도 마찬가지다. 집권 당국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여러 억측이 난무한다. ‘권력투쟁’의 시나리오는 여전히 인기 최고다. 그럼에도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 낙마한 보시라이의 혐의 내용이 너무 뚜렷하고, 깊으며, 많다. 낙마할 충분한 조건을 모두 갖췄다. 네 가지 키워드를 뽑았다. 전통적인 중국 정치가 보였던 특징이다. 그를 따라 중국 건국 뒤 최대 정치스캔들이라고 부르는 이번 사건의 맥락과 의미를 짚어 본다.

▲중국 정치의 차세대 스타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가운데) 가족의 단란했던 모습이다. 왼쪽이 부인 구카이라이, 오른쪽이 아들 보과과다. [중앙포토]

1. 천자 vs 제후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天高皇帝遠)’는 중국말이 있다. 땅에서 한참 높이 있는 하늘, 영향력을 미치기 힘든 먼 곳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의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먼 변두리를 말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황제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 또는 그곳에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요즘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중국의 권력 스캔들, 이른바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의 주인공 보시라이가 꼭 그 경우다. 그는 공산당 중앙이 있는 베이징(北京)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서남부 직할시 충칭(重慶)의 ‘권력 1인자’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었던 별명의 하나가 ‘서남왕(西南王)’이다.

과거 봉건 왕조 시절의 권력 최고 정점은 황제였다. 그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은 반역의 죄로 다스렸다. 그러나 중국의 땅은 넓고 크다. 그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변두리에 머물고 있던 지방의 권력자 제후(諸侯)는 따라서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보시라이에게 ‘왕(王)’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서남의 변방에 자리 잡고 황제를 위협하는 제후 식의 행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2007년 중국 서남쪽의 충칭시 당서기를 맡은 뒤 포퓰리즘 성격이 농후했던 ‘혁명 가요 다시 부르기’의 ‘창훙(唱紅)’과 조직폭력배 소탕을 의미하는 ‘다헤이(打黑)’를 주도했다.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과거 공산당의 급진 좌경화 노선이었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이념성을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유지하는 ‘지속적인 개혁·개방’의 실용주의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든 셈이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 그중에서도 9명이 이끄는 정치국 상무위는 과거의 틀로 설명하자면 곧 현대 중국의 ‘황제’다. 보시라이는 그런 황제가 추진하는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급기야 9인 집단지도체제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낙마했다. 그러나 보시라이의 ‘튀는’ 성격은 일찌감치 나타났다는 게 정설이다.

보시라이는 1992년부터 7년 동안 시장으로 재직했던 다롄(大連)에 ‘화표(華表)’라는 기둥을 세웠다. 지금의 베이징 자금성(紫禁城) 앞에서나 볼 수 있는 건축물의 하나다. 황제가 자신이 거주하는 황궁이나 죽어서 묻히는 황릉 앞에 세우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것도 자금성 앞의 화표가 9m 남짓인 데 비해, 다롄의 화표 높이는 19m가 넘는 크기였다.
이 화표에 대해 1999년 다롄을 방문한 당시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은 “중국 어느 도시에도 베이징을 제외하곤 화표를 세운 데는 없다”며 혀를 찼다고 한다. 자신의 측근이었던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을 시켜 충칭을 방문한 중국 최고위 지도자를 감청한 사실, 나중에 중앙의 공안계통을 무시한 채 전격적으로 그를 해임한 사건 등은 모두 표적대에 올랐다.

제후가 황제의 권력을 탐하는 일은 참월(僭越)이라고 불렸다. 반역에 버금가는 죄였다. 지도부가 표방하는 ‘지속적인 개혁·개방’에 반기를 들었던 보시라이의 여러 행동에는 분명히 그런 요소가 들어 있었다는 게 중평이다.
 
2.사자후(獅子吼)
중국에서는 아주 무서운 안주인을 말할 때 ‘하동의 사자가 울부짖다(河東獅子吼)’란 말을 쓴다. 성격이 사납고 무서운 아내를 일컫는다. 권력자의 여인들이 대개 이런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쑹메이링(宋美齡), 장칭(江靑)이 대표적이다. 쑹메이링은 1920~30년대 중국 대륙 권력자였던 장제스(蔣介石)의 부인, 장칭은 현대 중국을 건립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이다.

‘중화민국의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의 쑹은 장제스 권력의 이면을 관리했다. 친정과 인척(姻戚)인 공씨(孔氏) 집안의 막대한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데 실질적인 주도자였다.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간 뒤인 1949년 이후에도 막대한 재산을 운용하며 대만 최고 권력자인 장제스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했다.

장칭은 노쇠한 마오쩌둥을 대신해 권력을 휘둘렀다. 1966년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며 중국 전역에 숱한 피바람을 뿌린 인물이다. 결국 복권한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그녀가 주도했던 4인방이 꺾이면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의 행적도 마찬가지다. 해외 재산 관리를 맡았던 영국인 닐 헤이우드를 살해한 혐의, 남편의 권력을 활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뒤 막대한 부당수입을 올린 혐의에 싸여 있다.

구카이라이의 ‘사자후’는 결국 큰 문제를 빚었다. 영국인 독살 혐의와 그를 둘러싼 잡음으로 보시라이의 최측근인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해 결국 남편이 낙마했다. 현 총리 원자바오(溫家寶)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 차기 최고 지도자로 꼽히는 시진핑(習近平)의 부인 펑리위안(彭麗瑗)은 잘 알려진 권력자의 아내들이다. 이들이 ‘사자후’의 안주인인지, 아니면 현숙한 내조(賢內助) 스타일인지를 중국인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다.

3. 막료(幕僚)
동진(東晋·316~420년) 때 중국에서는 ‘장막 안의 손님’을 뜻하는 ‘입막지빈(入幕之賓)’이라는 성어가 탄생하면서 ‘막료’의 개념이 처음 선을 보였다. 그 뒤 줄곧 중앙이나 지방 고관들에게는 참모가 따라다니면서 그룹을 형성했다. 막부(幕府)란 단어도 그래서 생겼다. 이를테면 중국은 막료, 막부의 생산지다.

보시라이 사건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가 이 막료다.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왕리쥔은 보시라이가 다롄시 시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측근으로 행세했던 막료 중의 막료다. 돈줄을 댔던 경제계의 대표적인 막료는 다롄에 근거지를 둔 스더(實德)그룹 회장 쉬밍(徐明)이다. 왕리쥔과 쉬밍 모두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다. 군부에서도 혁명원로 후세인 태자당 그룹의 류위안(劉源·전 국가주석 류사오치의 아들)과 장하이양(張海陽·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장전의 아들)이 보시라이와 정치적 명맥을 함께했던 막료 그룹이다. 그러나 군부 내의 보시라이 인맥은 그가 낙마함과 동시에 중앙의 지도부에 충성 맹세를 하면서 등을 돌렸다. 보시라이 막료 그룹이라고 볼 수 있는 정·관·재계의 39명은 모두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4.비단 바지(紈袴)
중국은 예부터 아무나 못 입는 비단 바지, 환고(紈袴) 차림의 아이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 귀족의 자제들이라서 늘 말썽을 부리는 젊은이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보시라이의 아들 보과과는 전형적인 고관의 말썽 많은 자녀, 즉 ‘비단 바지’였다.

미 하버드대에 유학하면서 파티광에 초호화 생활을 하며 일찌감치 매체의 관심을 끌었다. 12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한 해 학비가 4만5000달러에 이르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재학 때는 학과시험에 낙제해 1년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영국 주재 중국대사 등이 특사단으로 학교를 다녀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하버드 대학 재학 때 그는 ‘큰손’으로 통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몰려간 술집 계산서는 그의 몫이었다는 얘기다.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 때는 비싼 입장권을 친구들에게 마구 뿌려 화제를 낳기도 했다.

‘비단 바지’의 현대판 계승자들이 중국 혁명원로, 또는 고관의 자제들을 일컫는 ‘태자당’이다. 그들이 모두 보과과처럼 ‘막 나가는’ 행동으로 주목을 받지는 않았으나, 각종 이권에 개입해 경제적 실력을 쌓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아들 장몐헝(江綿恒)은 중국 IT업계의 실력자로 성장했고, 리펑(李鵬) 전 총리의 자녀들은 중국 전력(電力)산업의 가장 큰 실력자로 컸다.

‘권력 투쟁’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보시라이가 저지른 과오는 매우 명백하다. 지도부가 추진하는 노선에 반기를 든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정과 비리, 심지어는 외국인 독살 등의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중국 지도부가 신속하게 그의 낙마를 결정한 데 이어 정치국원과 중앙위원의 자격을 박탈한 이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중국 공산당은 중앙과 지방의 전통적인 대립, 직위에 있지 않은 처와 인척 등의 발호와 부정 축재, 막료 시스템을 통해 쌓는 집단 비리, 자제들의 사치 등 부정적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과거 봉건 왕조의 암울했던 현상들이 현대 공산당 집권의 중국에서 다시 버젓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중국인들은 큰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보시라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에 커다란 역풍을 불러들인 셈이다.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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