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체육관서 사라진 중도 러닝머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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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호 02면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은 지난해 10월 중순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성향을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우리 사회의 정치구도가 너무 왜곡돼 유럽의 보수-진보와 다르다. 합리적인 보수만 돼도 진보로 비칠 수 있다. 아마 내 정체성도 ‘합리적 보수’ 정도 아닐까. 내가 좌파 소리를 듣는 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정치지형 탓일 수 있다.” 당시에 문 고문은 4·11 총선 출마 결심도 내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의 고민과 진정성이 가슴 깊이 느껴졌다.

이양수의 세상탐사

4·11 총선 직후 민주당에서 중도노선 논쟁이 불붙고 있다. 원내 과반 의석은커녕 제1당 기대까지 무너지자 야당 지지자들의 허탈감이 커지면서다. 한명숙 대표 사퇴 후 민주당은 친노(親盧·친노무현)-비노(非盧) 세력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하고 있다. 문성근 대표권한대행과 이인영 최고위원 같은 이는 ‘좌(左)클릭’이 아니라 ‘잘못된 전략·전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문 대표대행은 지난 20일 보수언론을 겨냥해 “씹다가 지치겠죠. 지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 믿어지지 않는 발언이다.

문재인 고문이 6개월 전에 했던 얘기를 다시 떠올린 건 민주당 내부의 4·11 총선 평가·반성이 치열하지 못해서다. 민주당 지도부는 통합진보당과 선거연대를 하려다 너무 왼쪽으로 달려가 선거에 패했다는 사실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한다. 심지어 정당 지지도로 보면 이겼다는 해석도 내놓는다. 겸손하게 반성해야 할 때 옹고집 영감처럼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라고 우기는 격이다.

문성근 대표대행은 친노 세력의 상징 같은 존재다. 친노 세력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탄생하자 ‘폐족(廢族)’을 자처하며 정계를 떠났다. 그런 어려운 시기에 문 대표대행은 전국을 돌며 ‘백만 민란’ 집회를 주도했다. 한마디로 절치부심했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까지 겹쳐 친노 세력은 2010년 6·2 지방선거와 이번 총선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러나 최근 문 대표대행의 돌출성 발언들을 분석해 보면 이념과잉과 정치적 조급증은 여전한 것 같다. 아무리 3주(週)간의 짧은 임기라지만 해야 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다. 수구 꼴통, 수구 언론이라는 단어 속에는 ‘역(逆)색깔론’의 사고가 흠뻑 묻어난다. 혹여 ‘우리 만이 정도(正道)’라는 오만함이 아닌지 묻고 싶다.

이제 시선은 12·19 대선 레이스로 쏠리고 있다. ‘대세론’의 순풍을 업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될 경우 야권은 비(非)새누리당 세력을 총망라하는 연대·연합밖에 길이 없다. 야당 내부에선 ‘3룡’(안철수·문재인·김두관)이니 ‘5룡’(3룡+손학규·정세균)이니 ‘7룡’이니 하마평이 무성하다. 그중 문재인 고문은 이번 총선에서 부산·경남(PK)의 교두보를 확보한 저력을 과시했다. 야권연대(민주당+통합진보당)의 부산 지지율을 40.2%로 끌어올린 일등공신이다. 그럼에도 문 고문은 특유의 침묵 모드를 지키고 있다. ‘대망론’과 ‘역할론’ 사이에서 좌고우면하는 눈치다. 중도노선 논쟁과도 거리를 두려 한다. ‘합리적 보수(또는 진보)’를 지향하는 문 고문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안철수 교수와 어떻게 접점을 찾아갈지 주목된다.

어느 나라든 큰 선거는 결코 선명성 경쟁으로 끝나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도 ‘선동 정치’를 가려낼 안목쯤은 갖추고 있다. 민주당이 12월 대선에서 중도세력까지 포괄하는 경쟁력 있는 ‘종합체육관’을 지향한다면 좀 더 다양한 운동선수와 운동기구를 갖춰야 한다. 진보가 좋아하는 러닝머신만 갖춰 놓고선 결코 이길 수 없다. 대안 없는 심판론에만 기대다간 12월 대선은 이번 총선의 데자뷰가 될 것이다. 노동자 출신의 룰라 대통령이 8년 집권 기간 중 경제체질을 바꾼 브라질의 사례는 한국의 민주당이 두고두고 벤치마킹해야 할 사례다. 민주당에 지금 필요한 건 ‘이념 원리주의’가 아니라 민생·화합·통일의 비전과 실천전략이다. 문재인 고문을 비롯한 민주당의 원로·중진들은 언제까지 팔짱만 끼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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