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제대로 썼나] 1. 들쭉날쭉한 집행기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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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자금을 놓고 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97년 말 이후 지금까지 1백1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됐지만 과연 적재적소에 쓰였는지, 회수는 가능한지 모두 궁금해 한다.

'공적자금=공짜자금' 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국회는 지난 1일 공적자금 40조원 추가 조성안을 통과시키면서 오는 15일부터 공적자금 전반에 대해 국정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공적자금 조성 및 집행과정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물을 마련했다.

<글싣는 순서>

① 들쭉날쭉한 집행기준
② 이렇게 새나갔다
③ 1백10조원 지금 어디에
④ 관리.감시 시스템도 엉망
⑤ 어떻게 관리.회수할 것인가

"저는 서명 못합니다."

"왜 못해?"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만큼의 공적 자금을 넣어야 하는지 설명이 없잖습니까."

지난 9월 예금보험공사의 보험관리과.한국투신과 대한투신의 공적자금 투입 실무담당 박영탁 책임역은 두 투신사의 경영정상화 계획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집행서류에 서명을 거부했다."두 투신사에 4조9천억원을 또 투입하면서 경영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지,투입규모가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 근거가 일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먹혀들지 않았다.이미 '재경부와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다 얘기가 끝난 일'이라는게 윗분들의 설명이었다.그는 담당자도 모르게 결정되는 공적자금 집행에 분개해 지난 9월 사표를 내고 종적을 감춰버렸다.

실제 한국·대한투신의 공적자금 투입은 금융감독원이 20여일간의 약식 실사를 통해 소요액을 결정했다.부실을 정확히 따져 필요금액을 산출하려면 전문회계법인이 실사를 하더라도 최소 두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당시 업계의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금감위 관계자는 "(두 투신 때문에)자금시장이 크게 불안했던 터라 절차를 서루른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자금투입 후 산동회계법인의 엄정한 재실사를 거쳤고,결과는 금감원 실사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동회계법인은 두 투신사의 실사결과 보고서에 "이 보고서는 (기초 자료가 부실해)정확성이 떨어지며,이를 (공적자금 투입)근거로 활용할 수 없다"는 '의견거절'판정을 내렸다.

산동측은 대우채권·기업어음(CP)등 잣대에 따라 몇백억원씩 차이가 나게 마련인 '민감한'자산들을 평가할 때 금감원이 제시한 기준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요컨대 회계법인의 실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평가를 자신들이 별도로 한 것이 아니라 금감원이 했다는 얘기다.

금감위가 공적자금 투입규모 등을 대충 결정하고 나중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회계법인을 동원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주먹구구식 실사를 토대로 작성한 두 투신사의 정상화 계획은 금융감독원 내부에서조차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보고서가 작성됐을 정도였다.예금보험공사의 감사도 문제점을 인정,'후열(後閱-나중에 다시 검토)'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하지만 금융감독위원회와 재경부는 이에 아랑곳 않고 예정대로 공적자금을 집행했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는 "돈을 지원하기 전에 일단 회생할 것인지 퇴출시킬 것인지를 먼저 결정한 뒤 정상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구조조정 노력에 따라 순차적으로 지원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밀치 못한 실사는 대한생명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금감원이 지난해 6월말을 시점으로 대한생명을 실사한 결과 순자산 부족액은 2조6천7백53억원이었다.

그러나 안건회계법인이 재실사한 결과 대우관련 추가 부실(약 6천8백억원)이 드러나 순자산 부족액은 3조3천억원선으로 늘어났다.

올 상반기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의 실사 결과 지난 3월 현재 순자산 부족액은 3조6천5백억원에 달했다.

제일은행 매각작업이 한창이던 1998년 5월.매각 주간사였던 미국의 모건스탠리측과 재경부 관계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향후 제일은행에서 발생하는 부실채권을 정부와 인수자가 80대 20으로 분담한다는 조건(loss sharing)을 왜 못붙이겠다는 겁니까.이런 나라는 처음 봅니다."(모건스탠리)

"안됩니다.그러면 매각가격이 떨어집니다."(재경부)

나중에 추가 부실이 생겨 공적자금을 더 투입하더라도 당장은 좀 더 비싼 값에 팔겠다는 것이 재경부의 의도였다.

"아닙니다.손실분담 조건을 붙여야 인수자들의 무리한 요구를 차단할 수 있습니다.또 추가 손실을 1백% 떠안아줄 경우 인수자측은 부실채권 회수노력을 게을리해 결국 한국정부 부담은 커질 수 있습니다.향후 공적자금 투입을 최소화하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모건스탠리)

그러나 정부는 결국 제일은행의 추가 발생 부실채권을 전액 보상해 준다는 계약조건(풋백옵션)으로 미국의 뉴브리지캐피털에 제일은행을 5천억원을 받고 팔았다.그 결과 이미 들어간 공적 자금 12조5천억원 외에 2002년까지 최대 5조원이 더 지원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당시 매각작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정부는 추가로 투입될 공적자금 보다 당장 매각가격이 낮으면 쏟아질 비난에 더 신경을 썼다"며 "손실분담 조건을 붙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부실은행에 대한 공적자금 집행에도 일관된 기준이 없었다.부실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 해외에 매각한다는 방침에 따라 제일은행에는 요청한 대로 12조5천억원을 지원했지만 한빛은행에는 대충 절반만 주는데 그쳤다.

한빛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상업·한일은행 합병추진위원회는 합병 이후 잠재부실까지 반영해 9조5천억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금감위에 전달했다.정부는 당초 소요액을 전액 지원해 준다는 입장이었으나 막상 요구액을 받아본 금감위는 "너무 많다.전부 다 줄 수는 없다.절반만 줄 테니 나머지는 외자유치·부실채권 회수 등을 통해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한빛은행의 고위 간부는 "당시에는 공적자금을 많이 요청하면 정부가 훨씬 강도높은 자구노력을 요구할 것 같아 이를 최대한 줄여 요청했다"고 털어놨다.결국 한빛은행은 지금 4조8천억원의 추가 공적자금을 요청한 상태다.

금융연구원 지동현박사는 "공적자금은 처음부터 경영이 정상화될 수 있는 지원규모를 정확히 산정해 지원해야 한다"며 "나중에 모자라서 추가로 투입하다 보면 훨씬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고 지적했다.

살아남은 서울·제일·평화은행과 퇴출당한 동화·경기·충청·대동·충청 은행 등의 운명이 엇갈린 이유에 대해서도 정부의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은행경영평가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당시 퇴출판정이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했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결정됐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런 예로 그는 평화은행의 예를 든다.그는 또 "한빛은행의 경우 상업과 한일은행이 합병하면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부실규모를 서로 줄인 반면 조흥은행은 그때 충분히 털었고,그 차이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부실은 감춘다고 없어지는게 아니라 더욱 심화될 뿐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공적자금 투입의 전체적인 밑그림은 정부내에 아예 없었다고 할 수 있다.정부가 97년말부터 98년 9월까지 64조원의 공적자금 조성을 국회에서 동의받을 당시 정부안은 ▶금융기관 증자에 16조원▶예금대지급·출연 등에 15조5천억원▶부실채권 매입에 32조5천억원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지난 8월 현재 사용내역을 보면 ▶출자가 4조원▶예금대지급 및 출연이 5조5천억원 각각 증가한 반면 부실채권 매입은 12조5천억원이나 줄어들었다.일단 64조원을 만들어 놓고 그때 그때 필요한 곳에 사용했다는 얘기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심상복 차장(팀장).정철근.정재홍.서경호(이상 경제부).이상렬.김현승.홍주연 기자(이상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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