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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서 ‘서울’ 가던 관문 … 양재역·강남대로로 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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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양재동 말죽거리의 1959년(위)과 2008년(아래) 모습. [중앙포토]

지금은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한양 도성과 통하는 큰길은 몇 없었다. 당시 양재대로(良才大路, 지금의 강남대로)는 도성에서 남쪽 지방으로 갈 때나 충청도·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표적인 길이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지금의 신사동 쪽인 한강변에 사평나루와 함께 사평원(沙平院)이라는 관용 숙박시설이 있었다. 주변엔 시장이 발전했다. 지금의 양재역 쪽에는 말죽거리라 불리던 양재역(良才驛)이 자리 잡았다.

 사평원이 있던 사평리(沙平里)는 지금의 신사동 지역 사평나루터를 중심으로 잠원동 지역의 한강변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사평나루는 강 건너 한남동 한강나루를 오가는 배가 많을 때 15척이나 운항할 정도로 번성했었다. 나라에서는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관리를 둬 통행하는 사람을 통제하거나 큰 바위에 눈금을 새겨 강물의 깊이를 측정해 도성에 보고하도록 했다. 한강의 지형이 바뀔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사평리 일대는 작은 비에도 침수가 되는 바람에 ‘한강 메기가 하품만 해도 동네에 물이 들어온다’는 우스갯말이 생기기도 했다.

 조선시대 강남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한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압구정 앞 한강에서 나오는 민물게는 궁중에 바치는 진상품이었다. 사평리의 앵두도 유명했다. 통행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조선 후기 들어 사평장이 들어섰다. 종로 육의전 상인을 위협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사평나루는 이렇게 오랫동안 도성의 통로 역할을 했다.

 한남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강남 농민들은 사평리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사평나루를 이용해 한남동 장터로 팔러 갔다. 압구정 일대에서 나온 것들은 압구정나루에서 금호동 장터로 건너가 공산품과 물물교환됐다. 광복 후 지금의 잠원동 지역에서 단무지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강남고속터미널 자리에 무밭이 많았다. 한때 공업용 색소 문제로 단무지 농사가 타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사평리, 압구정, 청담나루를 이용하지 않으면 강북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흑석동 쪽으로 걸어가서 제1한강교를 건너거나 사평리·압구정에서 강을 건너 뚝섬에서 자동차를 타고 동대문 종점으로 가는 것이 시내로 가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때는 강북 시내로 갈 때 ‘서울 간다’고 했다. ‘서울 갈 때’ 이용하던 사평나루터의 배는 규모가 커서 마차까지 실을 수 있었고 압구정 나룻배는 사람만 타는 작은 배였다. 고려시대부터 사평나루에 있던 사평원은 국가가 정부 관리와 길손들의 편의를 위해 운영하던 관영 숙박소였다. 그러다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차츰 쓰임새가 줄더니 폐쇄됐다. 사평원이 없어진 후에는 민간인들이 운영하는 주막이 등장해 그 기능을 이어받게 된다.

최병식
강남문화원 부원장
(문학박사·고고학자)

 ‘원(院)’이라는 시설을 여행객이 자주 이용하게 되면서 지명이 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뿐 아니라 장호원·조치원·사리원·풍수원 등도 모두 원이 운영되면서 얻은 지명이다.

 옛날 서울에서 충청도·경상도로 가려면 사평나루에서 양재대로를 거쳐 양재역을 지나야 했다. 당시의 역(驛)은 말을 타고 이동하던 장거리 여행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를테면 지금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휴식도 하고 요기도 하고 말에게 물과 말죽을 먹이며 다음 여행을 준비했던 것이다. 말을 이용하는 정부 관리는 여기서 말을 배정받기도 하고 오래 달린 말을 새 말로 교체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역은 자연스럽게 말과 연관이 많았다. 양재역은 우면산 동쪽 기슭 양재천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말에게 물을 먹이고 말을 씻겨줘야 하니 역은 냇가에 자리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양재역 근처 마을은 ‘역말’이라고 불렸으며 한자로는 ‘역촌(驛村)’이라고 했다.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서 ‘말죽거리’라고도 불렸다. 옛 지도를 보면 한강 남쪽에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고 표기된 곳을 볼 수 있는데 ‘말죽거리’의 한자식 표기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양재동보다는 말죽거리라고 해야 알아들을 정도로 유명한 지명이었다. 지금도 전국에는 ‘역말’ ‘역촌’ ‘역곡’ 등 역(驛)자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다. 이런 동네는 대개 옛날에 역이 있었다. 서울의 역촌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역곡동 같은 곳이다.

 말죽거리라는 지명과 관련해 전하는 말로는 1624년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충남 공주로 피난 가던 길에 양재역에 이르러 배고픔을 못 견뎠다. 김이라는 유생이 급히 팥죽을 쒀 임금에게 바쳤는데 인조가 급한 마음에 말 위에서 팥죽을 다 먹었다. 이때부터 ‘임금님이 말 위에서 죽을 먹었다’해서 말죽거리라 불렸다는 설이 있다. 또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해 있던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군의 병참기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용골대의 군사들이 말에게 죽을 쒀 먹이고 군수물품을 보충했던 까닭에 말죽거리라 불렸다는 말도 있다. 지금의 은광여고 자리도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병참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니 이 지역이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음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말죽거리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 양재 역사(驛舍)에 나붙었던 괴벽서(怪壁書)사건이 유명하다. 조선 초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의 모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명종 2년(1547년)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殼)이 전라도로 시집가는 딸을 전송하기 위해 양재역에 나왔다가 벽에 붉은 글씨로 ‘위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력을 농락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그대로 서서 기다리게 됐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한가’라고 쓴 벽보를 봤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권력자였던 이기가 주도해 봉성군을 처형하고 송인수·이언적 등 20여 명을 유배시킨 정미사화(丁未士禍)로 비화된다.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다’는 뜻의 양재(良才)역에서 어진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안타까운 사건을 사람들은 ‘양재역 벽서의 옥(獄)’이라 불렀다.

 예로부터 서울의 관문으로 도성과 강남을 이어주던 교통의 중심 사평원과 말죽거리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말죽거리는 지하철 3호선과 신분당선이 운행되는 양재역으로, 사평원은 지하철 9호선 사평역이 됐다. 그리고 강남과 남부지방의 물자가 오가던 양재대로는 강남의 중심을 관통하는 강남대로로 수많은 사람과 문화가 모이는 강남의 큰길로 발전했다.

최병식 강남문화원 부원장 (문학박사·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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