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인터뷰]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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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鄭世永)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건강했고 목소리도 힘이 넘쳤다.

지난해 3월 현대차를 떠난 뒤 언론과 접촉을 피해온 鄭명예회장을 23일 저녁 자서전 출판기념회를 한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양재찬 산업부장이 만났다.

그는 자신의 32년 자동차 인생을 담은 영상물이 상영될 때 감회가 새로운 듯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鄭명예회장은 현대건설에 대한 언급은 애써 피하면서도 자동차 이야기를 할 때는 크게 웃으며 여러가지 비화를 털어놓았다.

정도(正道)경영을 주창해온 그는 재벌 체제는 변화하고 있으며, 한국식 전문경영인 체제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자서전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내 이야기를 쓰려니 참 어렵더군요.살다 보면 부당하고 못마땅한 게 많은데 그대로 쓰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잖아요.톤을 낮춰 비판도 하긴 했습니다만 곤란한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더라구요."

-첫사랑의 아픔도 쓰셨던데,사모님께서 뭐라고 안하시던가요.
"마음씨가 착한 여성이었어요.손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지만 서로 느끼는 감정은 때묻지 않고 순수했습니다.큰형님이 권해 유학가느라고 헤어졌지요.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 사람도 가정이 있을텐데….행복하기를 빌었습니다."

-67년 현대차 대표이사를 맡았는데,그때 국내 자동차산업은 망치로 철판을 두드리던 시기가 아니었습니까.
"71년 가을인가요.2년 동안 끌어온 포드와의 합작 협상이 깨졌어요.당시만 해도 안보가 최우선이었습니다.포드가 국내에 들어오면 미군 1개 사단이 와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이었어요.

포드는 협상을 다 해놓고도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안들어왔어요.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때 포드와 합작했더라면 오늘의 한국 자동차 산업은 없었을 것입니다.외국 회사의 조립생산 기지에 머물었겠지요."

-지금도 외국에선 현대하면 포니 차를 떠올립니다.
"지금도 칠레와 이집트에는 포니 택시가 영업 중입니다.76년 에콰도르에 첫 수출한 6대의 포니 가운데 1백50만㎞를 주행한 차를 들여와 전시하고 있습니다.모양이 단순하고 견고해서 잔 고장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한국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있습니까.대우차는 저 지경이고,삼성차는 르노가 차지했고,외국 차 판매가 크게 늘고 있는데요.
"기업의 흥망은 경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GM이 대우차를 인수해도 요즘같은 분위기에선 제대로 가동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현대차는 기술과 판매망 등 기반이 잡혀 있습니다.현대·기아차가 국내에서 독주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만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 기업이 공략할 대상은 4천5백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60억 전 세계 소비자입니다.눈을 크게 뜨고 기업을 경영해야 합니다."

-현대·기아차를 맡고 있는 정몽구 회장은 잘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현대차를 떠난 지 1년반이 지났군요.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지금까진 잘해 왔어요.앞으로가 중요합니다.자동차에는 2만여개의 부품이 들어갑니다.우선 품질을 높여야 합니다.그 이후에 판매 전략을 잘 세워야 합니다."

-현대건설은 잘 헤쳐나갈까요.정몽헌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의 앞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현대차를 떠날 때 밤새 뒤척이며 '내가 오너냐,전문경영인이냐'고 자문하셨다는데 한국에 진정한 의미의 전문경영인이 있다고 보십니까.
"일본은 맥아더가 재벌을 해체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게이레츠'(계열)라는 용어를 씁니다.재벌 오너가 전부 잘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너가 분명해야 전문경영인에게 힘이 실립니다.오너 체제가 좋으냐,전문경영인 체제가 옳으냐 보다 얼마나 수익을 내느냐가 중요합니다.제네널 일렉트릭(GE)도 수백개 회사가 있고 젝 웰치 회장은 수익을 못내는 회사의 경영진을 엄하게 문책합니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수많은 재벌의 부침이 있었습니다.여러가지 제도가 바뀌었고,재벌도 스스로 변화하고 있습니다.새 시대의 오너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최고경영자의 능력은 시장에서 이익을 내느냐 못내느냐로 판단됩니다.삼성도 엄밀히 따지면 오너 경영이 아닙니다.

계열사 사장들이 대부분 알아서 결정한다고 들었어요.혼란없이 우리 방식대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투명하게 경영하고 이익을 내면 좋은 회사 아닌가요.시간이 문제지 결국은 미국식 경영으로 갈 것입니다."

-최근 이런 저런 사고도 많고,도덕적 해이를 걱정하는 소리가 많습니다.그러나 쓴소리를 하는 어른이 적습니다.경제정책에 문제는 없습니까.
"국가의 존재가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현 정부의 벤처 육성은 좋은 정책입니다.젊은 친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잖아요.

젊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빛을 내도록 해줘야 합니다.어쨌든 정치·사회가 안정되지 않으면 기업도 산업도 발전하기 어렵습니다.나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믿습니다.(그는 두손을 탁자 끝에 올려놓으며)지금 모든 산업의 위상이 선진국의 문턱에 99% 와있습니다.

마지막 1%의 정성을 다하면 우리 산업이 당당한 위치에 설 수 있습니다.선진국에 진입하려고 손을 뻗었는데 다른 나라가 발로 손을 차는 상황입니다.우리만 정신을 차리면 남들이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최근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조와 근로자의 불만이 많습니다.
"주5일 근무제는 시행해야 합니다.몇년전 현대차와 GM의 근로자 근무일수를 비교했더니 한해에 현대차는 1백48일을,GM은 1백47.5일을 놀더라고요.

GM은 토요일에 근무하지 않는데도 그렇거든요.우리도 주5일 근무하는 대신 생리휴가와 연월차 휴가를 없애고 공휴일을 줄여야 합니다.쉬는 날의 질(質)을 높여야지요.일하지 않으면 월급이 없다는 원칙도 확실히 지켜야 하고요.주말에 잘 쉬고 일할 때는 열심히 하는 겁니다.그러면 생산성도 올라갑니다."

-큰형님과는 자주 만나시나요.건강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제(22일)는 두차례 외출하셨다고 해요.그런데 언론이 너무하는 것 같아요.그냥 내버려 두지 그 연세에 몸도 불편하신데 미주알 고주알 다 씁니까."

-요즘도 직원들과 자주 만나십니까.자동차에서 건설업으로 옮기셨는데 무엇이 다릅니까.
"마르쉐가 나왔을 때 주변에서 뒷모양을 바꾸자고 했는데 내가 바꾸지 말라고 했어요.결국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세대차를 느꼈고,그 뒤부터 간섭을 덜했습니다.젊은층의 생각이 옳을 때가 있습니다.포니를 만들면서 이름을 공개모집했는데 당시 아리랑이 가장 많고 도라지·포니가 있었지요.

추첨할 때 아르바이트 여학생에게 물었더니 포니가 제일 좋다고 하더라고요.그래서 포니로 정했는데 역시 현명한 선택이었죠.제가 사업할 때는 밀어부쳐서 성공한 예가 많았으나,이제는 우수한 인재들을 뽑아 이들의 머리를 빌려야 합니다.자동차나 건설의 경영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수만가지 부품과 자재가 들어가고 좋은 품질과 마케팅이 중요한 점이 같습니다."

-젊은이들이 자서전을 읽으면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이 너무 공격적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만,세상살이가 '운으로 된다''재수가 좋았다'는 식으론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그렇게 정했습니다.

환경이나 시대적인 제약 때문에 똑똑한 사람이 시기를 놓치는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그러나 큰 흐름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기회는 몇번 찾아옵니다.실력이 없으면 기회를 잡지 못합니다.미래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요."

-포니 정의 차가 계속 곧은 길을 달리길 기원합니다.

만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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