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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돌아온 외팔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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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피아노 단기완성!/ 대입 미술 2개월 책임지도!/ 돈만 내면 즉석에서 흔쾌히 모든 걸 전수해주는/ 오늘날의 화끈한 싸부님 싸부님들/ 발랄한 제자들은 아무 때나 발랄하게 하산하여/ 아무 때나 아무 때나 칼을 뽑아 든다/ 복싱을 배우고 나면 흉기 같은 주먹으로 기껏 아내나 패고/ 소리를 전수 받으면 뽕짝이나 부르고/ 무술을 배우면 약장수 아니면 정치깡패나 되는/ 얄밉도록 발랄한 현실의 제자 여러분들…”

 ‘쌍화점’ ‘비열한 거리’ 등의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시인 유하의 ‘돌아온 외팔이’ 중 일부다. “하산해도 좋으니라/ 깊은 산중 사부님의 쩌렁쩌렁한 말 한마디 속에서/ 문득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발견한다…/ 아아 어떻게 배운 팔만사천 검법인가/ 물 긷고 밥 짓기 삼년/ 나무하고 장작패기 삼년/ 빨래하고 아흔아홉의 계단 쓸기 삼년…”

 장장 십오 년에 걸쳐 남해신검의 비법을 터득하고 하산한 뒤 “가는 곳마다 똘마니들이 찌럭찌럭 건들지만/ 끝끝내 검을 뽑지 않는 외팔이”와 얄밉도록 발랄한 현실의 제자들을 대비시키면서, 시인은 오늘날의 키치(kitsch) 현상을 날카롭게 비튼다. 키치란 격조 높은 예술세계와 달리 통속적인 싸구려 상업문화를 가리키는데, 윤리적으로는 야비한 거짓말쟁이를 뜻하기도 한다.

 곳곳에서 정치적 키치들의 성마른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선거철이 막바지에 접어든 모양이다. 정략에 따라 편리한 대로 말을 바꾸고 뒤집는 무의무신(無義無信)의 정치꾼들, 사악한 흑색선전과 속임수의 헛공약으로 민심을 후리는 선동꾼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닥치고 막말’을 상스러운 날것 그대로 뱉어내는, 얄밉도록 발랄한 변태 중독자들이 제철 만난 듯 선거판을 휘젓는다. 나라의 미래, 젊은이들의 절박한 꿈과 아픔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뿐인가? 민간인 불법사찰의 악습(惡習)을 둘러싸고 전·현 정권이 벌이는 책임 떠넘기기 싸움은 권력의 추악한 속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정치판의 위선과 기만(欺瞞)이 이렇듯 가증스러울 수가 없다. 논문표절·학위조작 의혹에 휩싸인 후보들을 내세우면서 변화와 쇄신을 외치고, 국민경선의 전화 여론조사에서 뒷장난질을 치면서 진보와 도덕을 부르짖는다. 반핵(反核)과 인권의 깃발을 내흔드는 사람들이 북핵이나 북한의 인권상황에는 눈을 질끈 감고 있다. 태극기를 들지 않고, 애국가를 부르기 싫어하고, 북녘 수령의 초상화 앞에서 묵념을 올리는 아리송한 이념꾼들이 대한민국 국회의원 배지를 노린다는 섬뜩한 지적은 그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땅바닥에 흘린/ 초이스 비스켓 하나/ 구물구물 어디서 몰려왔는지/ 불개미떼로 새카맣다/ 그 커다란 달콤한 쾌락 덩어리를/ 어떻게 떠메고 갈 줄 몰라/ 땀 뻘뻘 흘리는 것 같은 불개미들…/ 생의 달콤한 쪽으로 눈에 불을 쓰고/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 그 비스켓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니, 워메/ 극락 속에 지옥이 있었어!” (유하 ‘불(佛)개미 2’ 중)

 국회의원 자리를 한낱 ‘비스켓’쯤으로 아는지, 눈에 불을 쓰고 달려드는 모습이 한 치 앞을 못 보는 불개미들처럼 처절하다. ‘불개미’는 이렇게 이어진다. “대체 나라는 놈은, 현생이라는 비스켓/ 어디메쯤 달라붙어/ 한참 단꿈을 꾸고 있는가/ 불개미나 나나/ 한 치 앞을 선택할 수 없는 눈먼 장님이니”.

 공정사회 단기완성! 무상복지 5년간 책임지도! 즉석에서 흔쾌히 모든 걸 해결해주는 화끈한 정치 ‘싸부님’들의 큰소리에 우리는 또다시 귀를 쫑긋하고 있지 않은가? 너절한 정치판을 탓할 겨를이 없다. 국민을 우중(愚衆)으로 여기는 포퓰리스트들에게 나랏일을 맡겨온 우리 스스로를 탓할 일이다. 반성은 저들보다 유권자들이 먼저 짊어져야 할 몫이다.

 평론가 김현은 시인 유하를 “키치 중독자이며 키치 반성자”라고 불렀다. 키치의 진정한 의미는 ‘배설의 욕망’에 있지 않고 ‘반성의 성찰’에 있을 것이다. 쾌락 덩어리를 찾아 헤매는 불개미가 아니라 ‘성찰의 불(佛)개미’들이 필요하다. 아무리 의거(義擧)라고 떠받든다 해도 의사당 안에서 최루탄을 터뜨리거나 공중부양을 하는, 얄밉도록 발랄한 키치 활극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피폐한 서민경제, 폭발할 듯 긴장된 양극화의 갈등, 한반도를 둘러싼 엄중한 국제정세…, 숱한 난제들 속에서 우리는 이틀 후 소중한 주권을 행사한다. 언감생심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터득한 현인(賢人)이야 어찌 기대하랴마는, 그나마 국민을 속이지 않고 함부로 말을 뒤집지 않는 옹골찬 인물을 가려 뽑지 않으면 안 된다. 성찰과 사려 깊은, 저 듬직한 외팔이 말이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