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19) - 리치 애시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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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뉴욕 팬들은 분명 운이 좋았다. 미키 맨틀(뉴욕 양키스)과 윌리 메이스(뉴욕 자이언츠), 듀크 스나이더(브루클린 다저스)라는 세 명의 위대한 중견수가 펼치는 화려한 타격과 놀라운 수비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뉴욕에 인접한 필라델피아에 또 한 명의 걸출한 중견수, 리치 애시번이 있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다. 이는 매우 아쉬운 일이다.

애시번은 비록 뉴욕 팀들의 세 중견수처럼 홈런 퍼레이드를 벌어지는 못했지만 리키 헨더슨처럼 뛰어난 선구안과 타력, 그리고 도루 능력 등을 고루 갖춘 당대 최고의 리드오프 히터였다. 한 시즌에 타율과 4구, 두 부문에서 모두 리그 수위를 마크했던 1번 타자는 애시번뿐이다.

또한 그는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중견수였다. 그는 강견(强肩)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수비 범위가 메이스나 맨틀보다도 훨씬 넓다는 평을 들었으며, 풋아웃 부문에서 9회나 리그 수위에 올랐다.

청소년 시절 유망한 포수였던 애시번에게 처음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한 팀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였다. 그러나 이 때 애시번은 고등학생이었고, 규정에 걸려 이 협상은 중지되었다.

애시번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시카고 커브스도 그와 계약을 맺으려 했으나 역시 무산되었다. 결국 애시번은 노포크 초급 대학을 졸업한 뒤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하였다.

애시번은 필리스의 마이너 리그 팀인 유티커에서 활약하던 도중 중견수로 포지션을 바꾸라는 감독의 권고를 받아들였고, 이후 그의 타력은 빛을 발했다. 결국 그는 1948년 시즌을 앞두고 빅 리그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애시번의 앞에는 해리 워커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2년 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우승을 결정짓는 타점을 올렸고, 필리스로 이적한 뒤 맞은 첫 해인 1947년에 리그 타격왕에 오른 강타자였다. 당연히 애시번이 주전을 차지할 날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워커는 시즌을 앞두고 훈련 도중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애시번에게 뜻밖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애시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시즌 중반까지 .350에 육박하는 타율을 기록하였고, 23경기 연속 안타를 날린 첫 신인 타자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빅 리그 첫 시즌에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결국 그는 이 해에 카디널스의 스탠 뮤지얼에 이어 타율 2위에 올랐고, 부상으로 시즌 막판에 한 달 정도 결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32도루를 기록하여 이 부문을 제패하였다. 그리고 풋아웃 부문에서도 344개로 리그 1위에 올랐고, 1954년까지 그 자리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188안타로 이 부문 리그 6위에 올랐으나, 3할을 밑도는 타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애시번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순간이 왔다.

시즌 막판까지 선두를 유지하던 필리스는, 9월 중순부터 브루클린 다저스가 맹렬히 추격해 오는 바람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팀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맞붙게 되었고, 돈 뉴컴을 선발 등판시킨 홈팀 다저스와 에이스 로빈 로버츠를 내세운 원정팀 필리스는 1-1로 팽팽히 맞선 상태에서 9회 말에 접어들었다.

다저스는 9회에 피 위 리즈와 캘 에이브럼스의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의 천금 같은 찬스를 만들었고, 필리스의 감독 에디 소여는 다음 타자인 듀크 스나이더가 번트를 댈 것으로 보고 야수들에게 전진 수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로버츠가 스나이더에게 투구하려는 순간 소여는 2루 견제 사인을 냈는데, 정작 2루를 커버해야 할 미들 인필더들과 견제구를 던져야 할 로버츠는 사인을 보지 못했고 애시번이 사인을 보았다.

스나이더는 강공으로 맞서 중전 안타를 뽑아냈으나, 미리 전진 수비를 하고 있었던 데에다 2루에 뿌려져야 할 견제구를 받으러 달려오기까지 했던 애시번이 볼을 2루 바로 뒤에서 잡아 홈으로 송구하였다.

경기를 끝내는 득점을 올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홈으로 들어오던 에이브럼스는 아웃되었고, 필리스는 결국 이 이닝을 무실점으로 끝낸 뒤 연장전에서 결승점을 뽑아 35년만에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언론은 이 해의 필리스를 "The Whiz Kids"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애시번은 로버츠와 짐 컨스턴티, 커트 시먼스 등과 함께 이 내셔널 리그 챔피언 팀의 핵심 멤버였다.

필리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 패한 뒤, 애시번은 1951년 또다시 뮤지얼을 제외한 어느 내셔널 리그 타자보다도 높은 타율을 기록하였고 안타 부문에서는 리그 수위에 올랐다. 이로써 애시번이 리그 최고의 1번 타자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게 되었다.

1952년에 다시 약간의 부진을 보인 애시번은, 1953년 다시 내셔널 리그 최다 안타를 기록한 데에 이어 1954년에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4구를 골라내며 출루율 수위에 올랐다. 이어 1955년 그는 생애 처음으로 타격왕 등극이라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1956년 .303의 타율을 기록한 애시번은 이듬해에 187개의 안타를 날렸으나 3할 타자가 되는 데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1958년, 그는 .350의 타율로 생애 2번째 타격 타이틀을 차지하였고 또다시 리그에서 가장 많은 안타를 쳐냈다. 또한 그는 역시 리그 최다인 97개의 4구와 13개의 3루타를 기록하여,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였다.

1959년 시즌이 끝난 뒤, 필리스는 애시번을 커브스로 트레이드했다. 그는 커브스에서 보낸 두 시즌에 모두 3할을 밑도는 타율을 기록하였으나, 뛰어난 선구안을 살려 1960년에는 생애 4번째로 리그 출루율 부문 수위에 올랐다.

1961년 시즌이 끝난 뒤, 창단 후 첫 시즌을 준비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신생팀 뉴욕 메츠가 애시번을 영입하였다. 메츠는 1950년대에 뉴욕 양키스의 전성 시대를 이끌었던 명감독 케이시 스텡걸을 영입하여 의욕적인 출발을 하였으나, 애시번을 제외하면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선수는 전혀 없었다.

새 팀에서 맞은 첫 시즌인 1962년, 애시번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3할 타율을 기록하고 출루율 부문 3위에 올랐다. 그러나 메츠의 부실한 선수 구성은 여실히 드러났고, 결국 메츠는 이 해에 120패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애시번은 이 시즌을 마친 뒤에 몇 년 동안 더 현역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속한 팀이 너무나 형편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겼고, 결국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생애 마지막 시즌에 3할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은퇴 후 애시번은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인 네브래스카 주에서 공직 선거에 출마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그 뒤 그는 필리스의 방송 캐스터를 맡았다.

1995년 명예의 전당 원로 위원회는 애시번을 전당에 헌액시켰다. 그리고 2년 뒤인 1997년 9월, 그는 셰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메츠와 필리스 간의 경기에서 캐스터를 맡은 뒤 새벽에 호텔 방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돈 리처드 애시번(Don Richard Ashburn)

- 1927년 3월 19일 네브래스카 주 틸든에서 출생
- 1997년 9월 9일 뉴욕 주 뉴욕에서 사망
- 우투좌타
- 1948 ~ 195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 1960 ~ 1961년 시카고 커브스
- 1962년 뉴욕 메츠
- 생애 통산 기록 : 타율 .308, 29홈런, 586 타점, 234도루
- 명예의 전당 헌액 : 1995년 (By Veterans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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