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뿌리산업진흥법 반갑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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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세계 금융위기는 한 나라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교훈을 준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제조업이 역시 중요하다는 점이다. 유럽의 재정 위기 속에서도 독일이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하는 것은 제조업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이 무너진 미국은 무역적자와 고용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주력 제조업이 살아 있었던 까닭에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위기를 극복했다.

 한국 경제가 견실한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제조업 기반의 강화가 절실하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선진국들이 경쟁력 소생에 골몰하고, 중국 등 거대 신흥국들이 빠르게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이를 위한 근본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제조업 중에서도 뿌리산업을 보다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일이다. 주조·금형·용접·소성가공·열처리·도금 등이 대표적인 뿌리산업이다. 제품의 형상을 만들고 소재에 특수 기능을 부여하는 필수 공정들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나 최종 제품의 가치를 결정해 제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스위스 시계, 독일 자동차, 이탈리아 핸드백과 같은 세계적 명품들은 모두 튼튼한 뿌리산업의 토대 위에서 생성됐다. 한국 자동차·조선·정보기술(IT) 산업의 강한 경쟁력도 뿌리산업이 뒷받침해 준 덕분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차량 1대를 생산하는 데 6대 뿌리산업 비중이 부품 수 기준으로 무려 90%에 달한다. 미국 시장에서도 절대 뒤지지 않는 빼어난 디자인과 아름다운 색상은 모두 뿌리산업을 통해 창출된다. 국내 조선업은 미세한 틈새 하나 허락하지 않는 신기에 가까운 용접 기술이 있어 세계 1등으로 발전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신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갈수록 뿌리 산업의 성장 여건이 악화되고 있다. 시설이 낙후됐고 작업환경이 열악해 뿌리산업은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으로 치부된다. 이렇다 보니 생산성도 선진 경쟁국에 비해 뒤떨어지는 분야가 많다. 공산품 제작의 필수 단계인 소성가공이나 주조의 경우 1인당 생산성이 각각 일본의 5분의 1과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뿐 아니라 기술·기능직보다 단순 노무직 중심으로 고용이 늘고 있어 평균 임금 수준이 낮은 실정이다. 고령화가 심해져 40~50대가 전체 인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국내 젊은 층이 외면하는 바람에 외국인들이 그 빈자리를 급속히 채워가고 있다. 자칫하면 뿌리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이 악화될 우려가 높은 것이다.

 다행히 정부는 올해에 ‘뿌리산업진흥법’을 제정하고 정책지원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뿌리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 전문성과 숙련도가 높은 장인을 존경하고 우대하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일본의 뿌리산업이 강한 것은 투철한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모노즈쿠리 문화’가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를 들뜨게 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했던 국제대회 중 하나가 국제기능올림픽이었다. 한국 젊은이들은 여기에서 사상 처음으로 9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때마다 청와대나 국내 언론들은 스포츠 스타 못지않게 이들을 환대했다. 다시금 국내 산업의 근간인 뿌리산업에 종사하는 젊은 기능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높여 고용을 늘리고 제조업 강국의 위상을 지켜 나가야 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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