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시장에 도전하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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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심상복
경제연구소장

정부가 농수산식품유통공사를 앞세워 설탕 수입업자로 나섰다. 상반기에 약 1만t을 수입하기로 했는데 그중 1차분 2000t이 지난 19일 말레이시아에서 들어왔다. 정부가 설탕 수입에 직접 나선 건 민간기업을 믿지 못해서다. 현재 국내 설탕시장은 CJ제일제당·삼양사·대한제당이 국내 수요의 97%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3사가 설탕 공급가격을 낮추라는 정부 말을 잘 듣지 않자 몸소 나섰다. 그래서 수입 설탕을 마진도 없이 음료·빵·과자회사에 공급해 물가안정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가 좋다고 해서 시장이 그렇게 움직여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9일 수입한 설탕의 공급가격은 ㎏당 950원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민간 3사의 가격에 비해 10% 정도 싸지만 인기는 별로라고 한다.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제품이 그렇듯 가격과 품질을 같이 놓고 봐야 하는데, 정부가 무조건 가격만 중시하다 보니 설탕 수요 업체들이 품질을 못 미더워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상반기 1만t 수입 계획이 제대로 추진될지 의문이다.

 이렇게 꼬집으면 유통공사가 손해를 보고, 다시 말해 수입원가 이하로 공급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도 답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정도 물량으론 시장가격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 한번 싸게 공급할 순 있어도 그때뿐일 공산이 크다. 또 공기업이 손해 보고 팔아 생기는 적자는 결국 국가의 비용이라는 것이다. 광의로 보면 결국 이만큼의 세금을 쓰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무릇 일을 도모할 땐 비용과 지속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는 물가관리에 각별히 신경 썼다. 과자나 식품 가격이 오르자 해당 기업들을 닦달했다. 원료인 설탕 가격이 오른 탓이라는 답이 돌아오자 설탕 제조 3사를 도마에 올렸다. 위에서 다그치면 공무원들은 뭔가 그럴듯한 대책을 만들어낸다. 이번 일도 그렇다. 책상머리에 앉아 만들어냈다. 설탕 수입 경험이 전혀 없는 농수산식품유통공사를 동원한 것이다.

 시장논리를 강조하는 글을 자주 쓰지만 나 역시 시장 만능주의자는 아니다.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란 말도 잘 안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방아쇠 역할만 하면 시장의 흐름이 바뀔 수 있을 때를 노려야 한다. 억지로 해서는 시장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가 아닌 때, 정부가 시장과 겨뤄 이긴 경우는 없다.

 과천 경제팀이 주도하는 알뜰주유소도 마찬가지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휘발유값이 2000원을 넘어 물가와 서민생활을 어렵게 하고 있다”며 기름값 낮추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공기업과 합심해 알뜰주유소에 기름을 싸게 공급하고, 이들 주유소에 운영자금까지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알뜰주유소보다 값이 더 싼 주유소가 적지 않다. 이런 주유소의 존재를 널리 알려주는 게 더 효과적이다. 알뜰주유소를 새로 만들고 지원하는 데 들어가는 돈도 다 국민 세금이다.

 이 역시 지난해 초 대통령이 유가를 잡으라고 한 뒤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거나 정권이 바뀌면 흐지부지되기 십상이다. 지난해 정유사 팔을 비틀어 기름값을 그리 옥죄었지만 지금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지속가능성이 없는 정책은 헛돈만 쓰게 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약회사를 설립하겠다는 발상도 마찬가지다. 보험이 되는 약품 가격이 너무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공단이 직접 약장사를 하겠다는 아이디어다. 이 또한 공공 제약사 설립과 운영에 따른 비용과 예상되는 약값 인하 폭을 따져본 뒤 판단해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건강공단 퇴직자들의 일자리 늘리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다른 기대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장이 정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해서 국영기업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