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몸통'만 불리다 '체력' 탈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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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의 현대건설 사사(社史)는 곧 한국 건설산업의 역사다.

앞선 기술력과 개척정신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국내의 큼직한 역사(役事)를 독차지하다시피했다. '현대' 란 이름만으로 아파트 값이 비쌀 정도로 사랑받는 국민적 브랜드였다.

밖으론 선진 건설업체와 어깨를 겨루는 매출 7조4천억원(올해 예상)의 세계 17위 건설업체로 자랐다.

이런 기업이 어쩌다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으며, 한국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로 전락했나. 주부 金모(35.서울 방이동)씨는 "세계적 기업으로 여겼던 현대건설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고 의아해했다.

전문가들은 "변신을 망설이고 시장의 신뢰를 무시한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 깨닫게 해주는 타산지석" 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대건설이 시공 위주에서 선진국형 건설관리(CM)회사로 거듭날 기회는 최근 20년 사이 세번 있었다.

1980년대 초반, 90년대 중반의 두차례 해외건설 특수와 80년대 후반 신도시 건설이 그것이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세 차례 호황기의 여력을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로 변신하는 데 써야 했다" 며 아쉬워했다.

외형 불리기 경영에 나서 조직의 탄력을 잃은 탓에 외환위기 이후에도 제대로 된 구조조정 한 번 하지 않았다.

현대건설 임직원 수는 9일 현재 7천2백40명. 지난해 현대엔지니어링을 합병하면서 옮겨 온 인원 1천3백50명을 빼고도 3년 전 외환위기 직후의 5천8백6명보다 오히려 늘었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계열사를 도와야 하는 모기업으로서의 부담, 오너의 정치 참여 등으로 역량을 본업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부실 요인" 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오너 형제간 경영권 다툼과 무리한 대북사업에 실효성이 작은 자구책을 남발해 금융시장의 신뢰까지 잃어버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향영21C리스크컨설팅의 이정조 사장은 "현대건설이 공개한 재무제표나 쌓아놓은 수주물량(23조원)을 보면 영업상황은 지난해보다 나아진 것 같지만 시장의 신뢰를 잃은 것이 유동성 위기를 겪는 가장 큰 이유" 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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