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행세 하는 심부름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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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호 35면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작고 부유한 나라에 지혜로운 왕이 있었다. 백성을 아끼는 헌신적인 통치자였다. 인구가 늘고 영토가 확장되면서 혼자 나라를 다스리는 게 어렵게 되자 멀리 떨어진 지방에는 왕을 대신해 사절을 파견했다. 분권의 지혜를 편 셈이다. 그중 야심에 찬 사절이 왕 행세를 했다. 게다가 부정축재를 하고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왕의 심부름꾼 사절은 군주의 관용과 인내를 지혜롭다 여기지 않고 허약하다고 생각했다. 심부름꾼 주제에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결국 왕위를 찬탈하고 백성을 억압한 나머지 독재국가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이 일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주인으로 착각한 심부름꾼의 어리석음을 깨치라는 듯한 비장함이 느껴진다.

각 정당이 총선을 앞두고 심부름꾼론을 내세웠다. 서슴없이 자신들은 국민의 머슴이라고 말한다. 주인과 심부름꾼의 역할이 바뀌는 경우를 4∼5년마다 주기적으로 체험한 후 다시는 심부름꾼에게 속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요즘이다.

심부름꾼은 ‘국민만을 바라보겠다’거나 ‘국민의 행복을 책임진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속마음으론 스스로의 권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다 안다. 세금을 깎아주겠다, 살 집을 싸게 공급하겠다, 물가 걱정을 없애겠다,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겠다, 취직 고민에서 자유롭게 하겠다는 등의 공약으로 국민을 홀리는 데 혈안이 돼 있다. 그러나 심부름꾼으로 위장한 채 주인이 되려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는 건 어렵지 않다. 이번 4·11 총선 공천과정에서 양성 평등을 실현한다면서도 여성 후보 공천자는 고작 20% 미만에 그치지 않는가.

신학, 철학, 문학과 뇌영상의학을 전공한 이언 맥길크리스트는 주인과 심부름꾼에서 둘 사이의 입장이 바뀐 원인을 ‘둘로 나뉜 두뇌’의 권력투쟁으로 풀어냈다. 좌반구 뇌와 우반구 뇌는 비대칭적인 상태에서 효율성이 높은 쪽이 작업 전체를 맡는 승자독식 시스템에 의한 독재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는 두 개의 반구 중에서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양상을 달리해 왔다고 해석한다. 포용적인 우반구와 달리 좌반구는 실용 중심의 물질적 세계와 친화력을 가진다. 반면 우반구 뇌는 협력과 공유, 공감, 생명력을 복구시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두 개의 반구 사이에 있는 연결고리(뇌량)가 작동하지 못하면 각각의 특징은 발휘되기 어렵다.

난장판 국회도 거대 정당끼리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끝없는 충돌이 그 원인이다. 좌뇌와 우뇌 간의 승자독식을 위한 권력투쟁과 꼭 닮았다. 이게 한국 정치의 역사적 파노라마를 만들었다. 정치를 혐오하는 어머니들은 이렇게 말한다. 싸움 잘하는 자식은 커서 국회의원을 만들고, 욕 잘하는 자식은 정당판으로 보내야 한다고. 정치생태계 정화를 위해 공천개혁을 호언장담하던 여야 정당이 이번에도 역시 부정의 늪을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공천하면 너희들은 뽑아라’는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이는 주인 행세하는 심부름꾼의 전형이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손상된 ‘분할뇌 환자’는 좌측 시야로 본 이미지가 우뇌로 입력되어도 정작 이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뇌량 손상으로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가 우뇌와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거 때는 국민들의 마음을 보고도 선거 후에 이를 대변하지 못하는 ‘분할 뇌 심부름꾼’을 이번 총선에선 꼭 걸러내야 한다. 우뇌와 좌뇌를 연결하는 뇌량 구실을 담당할 심부름꾼을 찾는 노력은 주인인 국민의 몫이다.



강성남 서울대 행정학박사. 한국사회과학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보사회와 행정』『관료부패의 통제전략』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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