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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 접대하던 왕의 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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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호 32면

작설차(雀舌茶) 절기상 우수(雨水·양력 2월 19일께)나 곡우(穀雨·양력 4월 20일께) 사이를 전후해 딴, 참새 혓바닥같이 생긴 지극히 어린 잎으로 만든 차.

우리는 백제로 불교가 전래된 이후부터 고려가 망할 때까지 근 1100년 동안 화려했던 차문화의 역사가 있다. 동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常綠)의 넓은 잎나무인 차(茶)의 기원지는 중국의 운남·사천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차를 마시기 이전에 찻잎을 소금절임해 김치처럼 먹기도 했다. 그 후 분말로 만든 찻잎에 물을 부어 마시는 말차(抹茶) 단계를 거쳐 현재는 찻잎에 끓는 물을 부어 그 침출액만 마시는 엽차(葉茶) 단계에 이르고 있다.

김상보의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본 제철 수라상 <15> 작설차

백제 침류왕 원년(384)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왕실불교가 시작됐다. 당시 동진에서는 차 마시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술이 빨리 깨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능 덕분이었다. 찻잎에 쌀풀을 섞어 다병(茶餠)을 만들고, 이것을 볶아 가루로 만들어 계수호(鷄首壺·닭 모양의 뚜껑을 가진 차병)에 넣은 다음 뜨거운 물을 붓고 파·생강·귤 등을 곁들인 다갱(茶羹)을 만들어 찻잔에 따라 마셨다. 그런데 계수호와 여기 딸린 찻잔 세트가 백제 담로 지역 수장(首長)에 해당하는 고분군에서 발굴됐다. 백제의 왕과 귀족들이 차를 즐겼다는 이야기다.

한반도로 차가 전래된 것은 한성백제 때라고 생각되지만 기록상 초출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 선덕여왕(632~647)이다. 차의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흥덕왕 3년(828)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서 차종자(茶種子)를 얻어와 지리산에 심었다.

차 문화는 사원을 거점으로 퍼져나갔다. 충담(忠談)스님으로부터 차 한잔을 얻어마신 경덕왕(742~764)이 차에 깊이 매료돼 월명사(月明師)에게 차를 하사한 예는 유명한 이야기다(『삼국유사』).

고려에 접어들면서 차는 더욱 널리 유행했다. 사원에는 차를 바치는 다촌(茶村)이 있었고, 궁중에는 차를 공급하는 관청인 다방(茶房)이 있었으며, 궁중 연회는 차를 올리는 다연(茶宴)으로 시작했다. 일반인의 식사에도 차가 따라나와 일반 식사를 다반(茶飯)이라 불렀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차는 다병인 단다(團茶)를 가루내어 마시는 말차(抹茶)다. 고려의 귀족들은 송나라 남방에서 납일(臘日·동지 후 제3의 술일戌日) 전후에 잎을 따서 만든 단다인 납다(臘茶)를 마셨다. 궁중에서는 향기 나는 찻잎으로 용(龍)과 봉황(鳳)의 무늬가 있게끔 단다를 만들고 금가루로 입힌 용봉다(龍鳳茶)를 즐겼다.

토산품도 있었다. 전라남도 뇌원(腦原)이라는 곳에서 만든 단다인 뇌원다(腦原茶)와 우수(雨水·양력 2월 19일께)나 곡우(穀雨·양력 4월 20일께) 사이를 전후해 진주의 화계(花溪)에서 딴, 참새 혓바닥같이 생긴 지극히 어린 찻잎으로 만든 작설차(雀舌茶)가 그것이다.

고려는 청자의 대부분이 다기(茶器)일 정도로 차문화가 발달했다. 청자 찻잔에 푸른색의 단다 가루를 넣고, 감로수(甘露水)가 들어 있는 청자 다병의 뜨거운 물을 붓고 대나무로 가늘게 찢어 만든 솔을 계속 한 방향으로 저어주면, 찻잔 속에서 흰 구름과 같은 거품이 약 1cm에서 1.5cm 두께로 생긴다. 푸른 비취색 찻잔 속에 흰 구름이 떠 있는데, 그윽한 향기 감도는 말차를 마시면 그야말로 신선의 경지에 들게 된다. 이숭인(李崇仁·1349~1392)이 지은 작설차에 대한 시 한 수를 읽어보자.

“바다고을 이른 봄에 차가 나오는데/ 바구니로 캐고 캐니 맹아리(萌芽·새싹)가 새롭더라/ 봉하여 의조(儀曹)에게 부치고 묻노니/ 궁중의 용단(龍團) 맛과 어느 것이 진짜인고/ 황금가루 날고 옥색 이음에 난초 향기/ 타지 않아도 역시 기묘하여라/ 감란수(甘爛水·잘 저어서 거품이 많이 생긴 물) 맛이라니/ 공에게 의뢰하여 다보(茶譜·차에 관한 문서)를 지어 사람들이 알게 하리라.”

말차 마시는 것을 끽다(喫茶·차를 마심)라고 했던 풍속은 중국이 원나라 이후 엽차(葉茶)를 즐기게 되면서 고려의 말차도 엽차로 바뀌게 된다. 1363년께에는 말차의 재료였던 작설이 엽차의 재료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차나무의 최적지로는 바위틈과 자갈 섞인 토양을 가진 화계를 꼽았다. 화계동에선 심각한 차의 주구(誅求·관청에서 백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감)가 전개되었다. 백성들은 몸서리를 쳤고 마침내 차 생산을 막아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유교를 표방한 조선은 정부 차원에서 차가 불교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그러나 고려왕실의 궁중의례를 고스란히 속례(俗禮)로서 계승한 조선왕실은 중국 사신 접대 때 작설차나 인삼차를 나누는 것으로 예로 삼았다. 왕실 연회 때에도 으레 왕은 차를 마시고 연회에 임했다. 궁중에서 쓰이는 작설차는 경상도 고성·곤양·진주, 전라도 광주·남원·남평·능주·담양·순창·창평에서 진공(進貢)됐다(『여지도서(輿地圖書)』,1757).

차 생활은 전남 해남군 대흥사 출신의 초의(草衣·장의순·1786~1866) 스님, 강진과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정약용(1762~1826)과 김정희(1786~1856)에 의해 부활됐다. 이들은 고려의 차 문화를 계승해 고즈넉한 정취의 세계를 이끌어냈다. 숯불에 물주전자를 얹어 물이 석간수 내려가는 소리나 솔바람 같은 소리로 끓어오르는 시점에 물주전자를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불을 덜어 잠깐 끓는 것이 그칠 때 작설차를 넣고 차를 우려내 찻잔에 따라 마시면서 한거를 즐겼다.



한양대 식품영양학 박사『.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한국의음식생활문화사』『 조선시대의 음식문화』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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