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다리 잃은 뒤 오히려 감사할 일 늘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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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사무실에서 13일 팀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이홍승씨(왼쪽). 이씨는 왼손에 남은 손가락과 오른손 의수에 끼운 볼펜을 이용해 노트북 컴퓨터를 이용한다. [최승식 기자]

13일 오전 6시. 닐슨코리아 소비자본부 이홍승(38) 차장은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5살·2살 남매에게 뽀뽀를 해주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 택시를 기다려야 했다. 장애인 콜택시가 서울에 수백 대밖에 없어 자주 겪는 일이다. 서울 중림동의 회사로 출근한 그는 회의를 하고, 노트북 컴퓨터로 보고서를 정리하고, 아이패드로 업무 관련 e-메일을 보냈다. 평범한 직장인과 똑같은 일상이다. 이 모든 일을 진동휠체어에 앉아 왼손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어깨 근육만으로 한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1년 전 팔다리를 잃은 이씨는 닐슨코리아에서 ‘손가락 하나로 일하는 차장님’으로 통한다.

 2010년 11월, 고열로 병원에 간 후 이씨는 곧 의식을 잃었다. 3주 만에 눈을 떠 보니 두 다리와 팔이 새까맸다. ‘흡입성 폐렴구균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이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사례라고도 했다. 그해 12월, 그는 두 다리와 오른팔, 왼쪽 손가락 4개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 모든 일이 한 달 사이에 일어났다.

 통증보다 절망이 앞섰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닐슨코리아 신은희 대표이사가 병실을 찾아 이씨를 격려했다. “반드시 회사로 복귀하는 겁니다. 내가 사장으로 있는 한 닐슨에서 일합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이씨에게 큰 힘이 됐다. 절단 수술을 받은 지 한 달 후 막내 아들의 첫돌이었다. 한복 차림에 휠체어를 탄 이씨가 식당에 들어서자 참석한 친지와 직장 동료들이 모두 기립 박수를 쳤다.

 주변의 격려에 그는 재활 의지를 불태웠다. 신촌 세브란스 재활병원의 신지철 교수는 이씨를 위한 재활법을 연구했다. 어깨 근육을 키워 의수를 움직이고, 왼쪽 허벅지 근육과 오른쪽 골반의 힘으로 의족을 움직이는 법을 가르쳤다. 지난해 4월 부활절 아침, 이씨는 마침내 두 다리로 걸음을 떼었다. 마치 부활한 것 같았다.

 직장 동료들은 3월 전년도 성과급이 나오자 자발적으로 이를 모아 수천만원의 성금을 보내왔다. 너무 고마웠다. 이씨는 아직 통증이 심한 뭉툭한 왼손으로 한 달 내내 노트북을 클릭해 감사의 동영상을 만들었다. 재활훈련을 받고, 걸음마를 떼고, ‘고맙다’고 말하는 그의 영상 편지는 닐슨코리아 사무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가족은 더 단단해졌다. 지난해 6월 퇴원해 집에 돌아온 날, 아내는 “준비한 게 없는데 김치찌개나 먹자”며 상을 차렸다. 찌개를 한 숟갈 입에 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내도 울먹였다. “여보, 내가 잘해줄게.” 부부는 김치찌개를 앞에 놓은채 부둥켜 안고 울었다.

 지난해 9월 1일 드디어 그는 직장에 다시 출근했다. 9개월의 유급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이씨를 위해 회사는 새 조직을 만들었다. 새로운 마케팅·시장조사 기법을 연구하는 연구개발(R&D) 팀이었다. 예전처럼 외부를 돌아다니며 고객사를 만날 수 없는 이씨를 위한 배려였다.

미안해하는 이씨에게 신 대표는 잘라 말했다. “CEO로서 조직을 위해 실력 있는 직원을 붙잡은 것이다. 이 차장도 노력해 달라.”

 요즘에는 그에게 상담을 청하는 직원이 늘었다. 고민을 꺼내놓고, 함께 얘기하다 보면 대부분 “제 고민은 고민도 아니네요”라며 일어선다. 직원들은 “차장님 오신 뒤로 사무실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팔다리를 잃기 전에는 불만이 많았는데, 도리어 지금은 혼자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코를 푸는 것 같은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삶은 이제 내게는 의미가 없어요. 다른 이들에게 ‘저 사람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크게 울렸다.

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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