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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난, 일진회 … 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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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집 앞 은행에 들렀다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막 들어서는데 귀에 거슬리는 상소리가 들렸다.

 “씨바, XXX” “X랄하지 말고 확XXX.”

 조폭들의 대화가 아니다. 여학생들이다. 몸에 딱 달라붙게 입은 상의 하며 짧게 말아 입은 치마 하며 이마에는 변형된 깻잎머리까지. 한눈에도 ‘나 껌 좀 씹는 아이요’가 역력했다. 이런 애들을 만날 때마다 난 안타까운 마음에서 꼭 참견을 한다.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마나, 무서워라. 그런 흉한 말이 너같이 예쁘고 귀여운 애 입에서 나와 깜짝 놀랐다.” 옆에 있는 다른 애가 부러운 듯이 말을 한다. “이X아, 넌 좋겠다. 너보고 예쁘단다.”

 “아니, 넌 또 뭔 짓을 했기에 그리 날씬하냐? 나중에 모델이나 돼라. 모델도 요즘 똑똑해야 되는 거 알지? 공부 잘하는 똑똑한 모델이 ‘더 잘나가~’.” 요즘 유행하는 노래 흉내를 내며 이렇게 너스레를 떠니 둘이 서로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는다.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들이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사인 하나 해줘라. 대답 안 해?” “네에~.” 둘이 합창을 한다.

 나도 예전에 같은 말을 들었다. 1970년대 초반 사춘기 시절, 난 문제아였다. 정학까지 받았으니 요즘으로 치자면 일진회 멤버 정도 아닐까. 2주 만에 다시 다닌 학교생활.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곱지 않은 남들 시선도 싫고 공부도 싫고. 그때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 ‘야, 너같이 예쁜 애가 공부까지 잘하면 얼마나 예쁘겠냐? 나중에 미스코리아 되면 나 모른 척하지 마’. 나를 향한 따뜻한 관심이 깃든 그 말 한마디가 꺼져가는 내게 불을 지펴준 것이다.

 튀는 아이, 불량서클 아이 그들에게도 이유는 있다. 가난, 부모의 이혼, 신체적 결함 등등. 난 촌스러운 이름이 문제였다. 이름만 들으면 다들 웃는 탓에 미리 쿨한 척, 노는 척했던 거다. 어린 마음에 그래야 좀 덜 촌스러워 보인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3 시절, 형식적으로 치른 무슨 시험인가를 백지화시키는 데 앞장섰다며 정학 처분을 받았다. 늘 설치고 대장 노릇을 하더니 대장답게 모든 걸 뒤집어쓰고 꼴 좋게 당한 거다. 자기 개성과 주장이 뚜렷한 이런 튀는 애들. 옆에서 잘만 잡아준다면 요즘 사회가 요구하는 꽤 쓸모있는 사람이 될 확률도 높다.

 친구 아들 중에 말썽쟁이가 둘 있다. 한 명은 지금 ‘떠오르는 광고 디자이너’가 됐고, 다른 아들은 완전 폐인이 됐다. 디자이너 아이는 부모가 이혼하자마자 그 반항심에서 ‘튀고 노는 아이’ 행동을 하다가 끈질긴 엄마의 노력 덕분에 툭툭 털고 일어나 잘 자라주었고, 다른 아이는 아무도 잡아주지 못해 그렇게 됐다. 인사성도 바르고 여린 마음씨에다 똑똑하고 바이올린까지 잘 켜던 아이. 미국 LA 폭동 때 가게 다 잃고 먹고살기 바쁜 부모가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혼자서 피자와 치킨 먹으며 폭식하다가 살이 찌면서 학교에선 왕따가 되고. 돼지라는 놀림을 받지 않으려고 그가 했던 일종의 방어책이 ‘쿨한’ 행동이었던 것. 볼이 통통하고 귀엽던 그 아이가, 바이올린을 멋지게 연주했던 그 아이가 학교에서 마약을 팔다가 걸려 미국 소년원에 갔다 오더니 아주 딴 아이로 변해버렸다.

 언젠가 미국 방문길에 그 친구 집에 들렀다. 몸집은 더 불어나 걷기도 힘들면서 나를 보더니 반갑다고 ‘하이~’ 하며 웃던 그 아이. 마약에 찌든 휑하니 초점 없는 눈동자.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마음이 아파 무척이나 괴로웠다. 바이올린을 켜는 그에게 누군가 칭찬 한마디 제대로 해줬더라면 지금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 아이.

 요즘 학교마다 비상이란다. 일진회인지, 불량서클 소탕인지 명단 작성해 올리고 낙인을 찍어 퇴학·전학시키고. 학교폭력 수준도 조폭을 능가한다니 미리 겁도 주고 따로 관리하며 영~원히 분리 감독하는 것도 필요는 하겠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이 최선인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그들을 방치하지 말고 불량한 싹이 보이는 초기에, 체벌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며 잘 잡아준다면 툭툭 털고 일어날 ‘껌 좀 씹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많이 널려 있을 터인데.

 애초부터 노는 아이, 착한 아이가 어디 따로 있다더냐. 다 어른 하기 나름이지.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