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링컨 차를 타는 판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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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사회부문 부장

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까. 잘못을 인정하는 게 결코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더라는 경험칙 때문일까.

 국민 앞에서 진심 어린 고백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법조인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재판의 과오나 수사 실패에 대해 반성하고 재발을 막기 위해 보고서를 낸 판검사는? 글쎄, 떠오르지 않는다. 2005년 유지담 전 대법관의 퇴임사가 거의 유일한 게 아닌가 싶다.

 “인사 때마다 일희일비하고, 주변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소신도 감춰가며 요령껏 법관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권력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진정코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침묵하였으면서….”

 노(老) 판사는 세세한 부분까지 반추하며 과연 자신이 최선을 다했는지 35년간의 법관 생활을 돌아봤다. 한국 법조계에서 흔치 않은 장면이다.

 Ⅱ.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소란의 중심에는 법조인이 있다. 대개 전·현직 판검사다. 지난해 선재성 부장판사가 법정관리 기업에 자신의 친구를 변호사에 선임하도록 알선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어 ‘벤츠 여검사’ 사건이 터졌다. 문제의 검사는 사건 청탁을 한 변호사에게 “백값 보내도! 신한 540만”이란 문자를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올 들어 잇따라 불거진 논란과 의혹의 주인공도 모두 법조인이다. 한나라당 돈봉투 사건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박원순 서울시장 아들 병역 의혹을 주장한 ‘저격수’ 강용석 의원은 변호사다. 기소 청탁 의혹은 판사인 남편(김재호)이 정치인 아내(나경원)를 비방한 네티즌을 기소해달라고 검사(박은정)에게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스스로 진실을 밝히거나 반성하는 이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박 전 의장은 의장직 사퇴 압력에 버티기를 계속했다. 핵심 관련자가 입을 열고서야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 ‘헛방’임이 확인된 뒤 의원직 사퇴서를 낸 강 의원은 “용서하겠다”는 박 시장 말에 “용서라는 표현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반응했다.

 Ⅲ. 기소 청탁 의혹은 형사재판의 기초를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다. 의혹을 처음 제기한 ‘나는 꼼수다’는 박은정 검사와 김재호 판사를 피해자 대 가해자라는 선악 구도 속에 넣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법조계 내부문화의 단면이 드러난 것으로 받아들인다. 청탁과 부탁, 민원 사이의 모호한 DMZ(비무장지대)에서 사법연수원 선후배들이 짬짜미(불공정 거래)를 해온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판검사 친구 하나 두지 못한 보통 사람들에게 ‘전화 한 통화’의 힘은 크게만 다가온다.

 김 판사는 경찰에 낸 진술서에서 “통화를 했지만 청탁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박 검사는 ‘청탁을 받았다’는 취지의 진술서를 제출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선 비공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의혹은 각자의 입장을 전달받는 서면조사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된다. 판사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검사는 어떻게 답했는지 구체적인 발언록을 공개하고 사회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Ⅳ. 곤란한 상황에 놓인 법조인이 한사코 입을 열지 않는 배경엔 모종의 특권의식이 어른거린다.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을 함께 다니며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허위의식을 키워왔다. 그 결과, 누구보다 법 앞에 충직해야 할 법률가들이 법 위에 서 있다. 법이 아무리 훌륭해도 법을 다루는 이들이 신뢰를 잃으면 그 사회의 법치주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영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The Lincoln Lawyer)’에는 고급 차종인 링컨 차로 허세를 부리며 LA 뒷골목을 누비는 변호사가 등장한다. 링컨 차는 일반인과 법조인을 구분 짓는 상징적 장치다. 이제 시민들은 법조인들에게 물을 것이다. 언제까지 못 들은 척 링컨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으실 거냐고.

권석천 사회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