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열정의 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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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고즈넉하다. 박목월의 시 '나그네' 에 나오는 '술 익는 마을' 이 연상될 정도로 사계절에 순응하며 농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일본의 한 산골마을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1백여년 전인 1896년 겨울. 군대에서 갓 제대한 도요지라는 청년이 스물여섯살 연상인 세키와 눈이 맞아 세키의 남편 기사부로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폐쇄된 우물에 버린다.

줄거리만 따지면 유치한 치정극이다.그러나 영화엔 사람의 마음을 움켜쥐는 대단한 힘이 있다. 극장문을 열고 나온 한참 후까지 영화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감독은 연초 개봉된 〈감각의 제국〉의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 〈감각의 제국〉과 같은 잔혹한 성묘사가 절제된 반면 금지된 사랑의 밑바닥을 샅샅이 훑어내는 감독의 작가정신은 말 그대로 치열하다.

피살된 남편의 혼령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세키. 그러면서도 그녀는 도요지의 품에서야 겨우 안정을 찾는 비련의 주인공이다. 도요지 또한 편안하지 않다.세키와의 사랑에 운명을 건다.이토록 맹목적인 사랑이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결론은 물론 비극이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사흘 만이라도 둘이서 살고 싶다" 는 처절한 희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라는 속세의 단순한 윤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세상은 아무 일없이 돌아간다는 자연의 순환법칙과 그 안에서 버둥대며 사랑하는 인간사의 모순이 인력거꾼인 기사부로의 수레바퀴를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진다.1978년작임에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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