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업에 강요하는 대북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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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든 쌀이든 우리의 대북지원이 다수 국민의 호응을 받으면서 지속성을 띠려면 무엇보다 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북한 식량.비료난은 새로울 것이 없고 지원 필요성 자체에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본다.

다만 정부가 자꾸 일을 쉬쉬하며 처리하고, 받는 쪽의 정확한 실태에 대해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없으니 의구심이 앞서는 것이다.

대한적십자사가 지난해 주관한 대북 비료지원 민간모금 실적이 부진하자 정부가 재벌과 공기업에 모금액을 반강제로 할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가스공사가 국회에 제출한 지난해 6월 이사회회의록은 '관계장관회의' 가 5대 재벌과 4대 공기업에 모금액을 할당한 탓에 예산을 전용하기에 이른 상황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정부가 결정했는데 반대할 수 없어 예산에 생각지도 않았던 기부(7억8천만원)를 하게 됐다" 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시에도 전경련이 한때 반발해 파문이 일었던 사안이다. 당시 전경련은 총 20억원을 내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했으나 정부의 압력을 받은 후 80억원으로 목표액을 늘렸다.

나아가 공기업들에도 관계장관이 사장을 불러 할당액을 '통보' 했다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알 수가 없다.

순수 민간모금이 부진하다 해서 부채비율 감축 같은 구조조정 노력이 한창이던 재계에 이런 '준조세' 구태를 강요하다니 말이나 되는가.

더구나 공기업의 가외부담은 국민의 호주머니를 강제로 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기업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까닭의 일단(一端)이 드러난 셈이다.

걱정은 앞으로도 비슷한 파행이 안 생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결정과정.비용조달.수송 등의 과정을 쉬쉬했고 국회마저 우회한 최근의 대북 쌀지원도 유형만 다르지 맥락은 같다.

사흘 전 청와대 영수회담에서도 거론된 현대의 대북사업 문제점도 결국 투자능력과 투명성에 기인한다. 대북지원은 매사를 투명하고 적법하게 처리하고 수시로 국회와 민의에 부쳐야만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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