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룡의 행복한 은퇴 설계] 미국 노후설계 기준은 남 92세, 여 94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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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

“몇 살까지 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은퇴 준비와 관련된 강연을 하러 가서 참석자들에게 자주 묻는다. 청중들은 80세와 85세 사이에 가장 많이 손을 든다. 90세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5%도 채 안 된다. 한두 사람이 100세 이상이라고 답하는데, 그러면 옆에 앉은 이들이 “뭘 그리 오래 살려 하느냐”며 웃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수명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4명 이상이 다가올 100세 시대를 ‘축복’보다는 ‘재앙’이라고 답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수명은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생명표에 따르면 50대의 경우 남성의 기대수명은 79.5세, 여성은 85.5세에 달한다. 지난 10년간 매년 4.5개월씩 수명이 늘어난 셈이다. 선진국이 매년 3개월씩 증가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가파른 증가세다. 하지만 이 수명은 이미 확정된 값이고 미래의 의료기술 발달로 인한 수명 증가는 반영되지 않았다. 미국 퍼시픽 연구소(PRI)의 시니어 펠로이자 저널리스트인 소니아 애리슨은 자신의 책 『150세 시대』에서 “실험실에서 배양한 장기를 이식하고 줄기세포를 통한 유전자 기술로 정복 불가능했던 질병을 치료하는 일이 이미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단순 수명뿐 아니라 건강 수명도 기적같이 늘어날 것이라 주장한다. 150세 시대가 열린다는 예측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노후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자신의 수명을 예측하는 것이다. 가정한 것보다 더 장수하면 노후자금이나 의료비 등에서 많은 차질을 빚게 된다. 삶의 질도 열악해질 수 있다. 최근 미국 재무설계사(FP)협회에 따르면 미국 FP들은 남성 91.7세, 여성 94세를 기준으로 노후 설계를 한다. 이렇게 노후 준비를 할 때 가정하는 수명을 설계수명(Planning age)이라고 한다. 수명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한국보다 훨씬 오래 산다고 가정하고 노후 설계를 하는 셈이다. 또 미국 사회보장청이 발표하는 생명표를 은퇴 설계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생명표의 기대수명은 국민 전체의 평균에 맞춰진 것이다. 인구의 절반은 계산된 연령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 노후 준비를 할 때 기대수명이나 평균수명 같은 통계 자료를 기준으로 자신의 수명을 정해서는 곤란하다. 기대수명보다 좀 더 오래 산다고 가정하고, 수명 증가 속도도 반영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모두 감안하면 최소한 90세 이상을 잡는 게 합리적이다. 일각에서는 금융회사들이 상품을 팔기 위해 무작정 오래 사는 것으로 공포심을 조장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내용들을 조금만 곰곰 생각해 보면 수명을 길게 잡는 것이 그리 ‘무작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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