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아름다운 고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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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역시 아름다운 영상과 어우러지는 고독이 딱 어울리는 계절이다. 쓸쓸한 낙엽이 떨어져 고독의 거리가 되려면 좀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마음은 어느새 가을 한 가운데에 와 있다.

이번주는 잔잔한 우울을 담아낸 '한없이 아름다운 슬픔'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마음 맞는 친구와도 좋고, 혼자 봐도 감미로운 고독의 영화들이다.

안개 속의 풍경 Landscape in the Mist ★★★★

감독 : 테오 앙겔로풀로스 / 주연 : 미칼리스 제케, 타니아 파레올로구 / 출시 : 1996년 12월 18일

아버지를 찾아 여행하는 두 남매의 고달픈 여정을 안개처럼 담담한 슬픔으로 그려낸다. 공연할 극장을 구하지 못해 바닷가를 배회하는 유랑극단, 시가행진을 벌이는 군인, 11살 소녀를 강간하는 트럭 운전사, 결혼식 날 울며 도망가는 신부, 첫사랑의 상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들이 그리스의 절망을 상징한다. 하지만 희망을 찾아내려는 여행은 멈춰지지 않는다.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시적 서정성, 아름다운 음악이 조화를 이룬 명작.

엄마와 함께 살고있는 불라와 알렉산더 남매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빠를 찾아 무작정 북쪽으로 가는 열차에 오른다. 기차에서 내려 정처 없이 걷다가 트럭을 얻어 타는 남매. 불라는 전날 밤 레스토랑의 여종업원에게 추근대다가 무안을 당한 트럭 운전사에게 강간을 당한다.

블루 Bleu ★★★★

감독 :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주연 : 줄리엣 비노쉬, 플로랑스 페르넬 / 출시 : 1994년 7월 1일

키에슬로프스키 세 가지 색 연작 중 '자유'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나머지 작품들은 평등의 주제를 담은〈화이트〉와 박애의 정신을 이야기한〈레드〉. 줄리엣 비노쉬의 애상적인 분위기가 물과 우울의 이미지를 간직한 파란색과 조화를 이룬다. 모든 것을 잃은 여인이 모든 것을 잊음으로써 자유를 얻으려 한다.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자동차 사고로 위대한 작곡가인 남편 파트리스와 어린 딸 안나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미망인 줄리. 그녀는 슬픔을 견디기 위해 과거의 모든 것들을 단호하게 떨쳐버리고 익명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런데 파트리스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줄리가 내 작업의 주인이고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이 기사화 되면서, 매스컴에서는 줄리의 사생활과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린파파야 향기 The Scent Of Green Papaya ★★★★

감독 : 트란 안 홍 / 주연 : 트란 누 옌케, 트룽 티 록 / 출시 : 1994년 11월

파란만장한 역사의 국가 사이공을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영화는 철저히 개인적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개인적 정서가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한 가난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청초한 영상과 촉촉한 음악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1993년 칸느영화제 황금카메라 수상작.

10세의 소녀 무이는 1951년 사이공의 한 부잣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무이 또래의 딸을 잃은 주인은 무이를 유난히 아끼지만 가세가 기울자 무이를 다른 집으로 보낸다. 10년 후, 무이는 젊은 피아니스트의 집에 기거하게 있다. 젊은 피아니스트는 무이에게 글을 가르쳐주며 무이의 순수함에 끌리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아비정전 阿非正傳 The Days of Being Blood ★★★☆

감독 : 왕가위 / 주연 : 장국영, 장만옥, 유덕화 / 출시 : 1991년 8월

제작 당시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 당한 고독과 상실의 '왕가위' 영화다. 행복 충만한 사랑이 아닌 늘 어긋나 버리고, 상대의 등만을 바라보게 되는 음울한 사랑을 통해 세기말의 고독과 외로움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한때 장국영의 홀로 추는 맘보춤이 광고에 패러디되어 주목받았다.

계모 밑에서 자란 아비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음울한 분위기의 청년. 사귀던 여자가 결혼을 요구하자 그녀를 버리고 술집 무희와 동거를 시작한다. 아비를 잊지 못하는 여자는 순찰 돌던 경관에게 사랑을 받는다.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 여행을 하고, 어머니를 찾지만 만나지는 않는다. 필리핀 거리를 헤매며 방황하던 아비는 밀림을 횡단하는 기차 속에서 경관이었던 남자와 마주 앉아 죽음을 준비한다.

이방인 Taekwondo ★★★☆

감독 : 문승욱 / 주연 : 안성기, 에바 가브뤼룩 / 출시 : 1998년 7월 8일

크쥐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촉망받는 제자였던 문승욱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폴란드의 쓸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방인 즉 낯선 한국인의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안성기의 고독한 분위기가 제대로 묻어나고 있는 영화다.

유럽 여러 도시를 떠돌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문 한국인 김은 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태권도 학원의 사범이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그는 오래 전 가족과 헤어지고 수많은 여정 끝에 비로소 바르샤바에 정착한다. 혼자 살아가는 그에게 이국생활의 외로움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인연이 찾아온다. 카페에서 일하는 욜라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되찾고, 우연히 마주친 어설픈 절도범 미하우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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