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중소기업 애태우는 ‘재난망 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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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10년째 끌어온 해묵은 논쟁이 있다. 국가재난안전통신망(이하 재난망)을 둘러싼 논쟁이다. 재난망은 지진이나 화재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군과 경찰·소방서 등 유관기관의 일사불란한 연락을 가능케 해 재산·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목적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때 시작됐다. 10년째 논쟁이 이어지는 이유는 어떤 통신방식을 사용할지를 놓고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다. 정부는 재난통신망만을 위한 ‘자가망’과 기존 통신망을 보완해 재난에도 쓰자는 ‘상용망’을 두고 좌고우면하고 있다. 자가망은 재난 시 실효성이, 상용망은 경제성이 우월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방식 선택 심사는 2004년부터 5회째 이뤄지고 있다. 검증기관은 한국개발연구원(KDI)·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한국정보화진흥원(NIA)을 두루 거쳤다. 현재는 한국전자파학회(KIEES)에서 심사 중이다. 주관부처도 정보통신부에서 소방방재청을 거쳐 행정안전부로 바뀌었다. 당초 3600억원 정도 예상했던 사업비용도 부쩍 늘어났다. 통신요금처럼 대중적인 관심을 끌 만한 이슈가 아니라 기업과 정부 같은 소수의 이해관계자만 있는 사안이다 보니 정책 결정은 더더욱 느려졌다.

 문제는 심사 결과가 나와도 과거 경험했던 것처럼 정부가 재난망 사업에 본격 착수할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통신 방식을 둘러싼 업체 간의 밥그릇 싸움과 골치 아픈 결정을 피하고 싶어하는 공직사회의 무책임이 더해진 탓이다. 그러는 사이 정부만 믿고 거액을 투자한 중소기업들만 투자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도산 위기에 몰리고 있다. 일부 업체는 청와대에 빠른 사업 이행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내는 상황이다.

 꼼꼼한 검증은 정책 수립의 필수 절차다. 하지만 지나치면 독(毒)이 된다. 신속한 정책 수립에는 ‘격발사건(Triggering Event)’이 필요하다.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불거지니 잇따른 대책이 마련되는 식이다. 재난망과 관련해서도 연평도 사태 같은 격발사건은 이미 충분히 겪었다. 다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정부가 무게 있는 결정을 내려 줘야 한다. 그래야 만약의 사태가 생겼을 때 추가 피해도 막고, 갈팡질팡하는 정책 사이에서 한숨짓는 중소기업도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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