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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에게 내린 가르침, 돌에 새긴 영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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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숙종이 쓴 ‘날 비(飛)’자. 세로 25.5㎝, 가로 16.3㎝, 두께 약 7.5㎝ 대리암에 새겼다.

“넓고도 굳세게 뜻을 세우고 너그러운 마음과 간편한 정책으로 백성을 통치하며, 공평한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똑같이 보고, 어진 이를 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려라.”

 영조 19년(1743), 왕은 사도세자가 관례(冠禮·성인식)를 치른 다음 날 아침 이 같은 내용의 친필 훈유(訓諭·가르침)를 내렸다. 사도세자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다.

 아들에게만 전한 건 아니었다. 영조는 이를 모두 12장의 돌판 앞뒤에 새겨 사국(史局·예문관과 춘추관)에 보관토록 하고, 인쇄본을 의정부에 내리는 등 널리 배포하라고 명했다.

 종이에 쓴 글도 1000년은 간다지만 불에 타거나 물에 젖으면 무용지물이다. 영조는 돌에 글을 새겨 그 뜻을 영원히 남기는 한편, 받드는 이가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랐을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돌에 새긴 조선 왕실의 글씨를 모은 『조선왕실의 각석(刻石)』을 냈다. 각석은 본래 창덕궁에 보관되어 전하던 것으로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106매, 국립중앙박물관에 59매씩 소장돼있다. 고궁박물관 소장 각석은 태조부터 선조·원종·효종·숙종·경종을 거쳐 영조·순조까지 모두 여덟 임금의 어필을 아우른다.

 각석 106매 중 영조 어필이 새겨진 것이 36매로 가장 많다. 숙종이 26매, 태조(5매)와 효종(4매)이 뒤를 잇는다. 어필 각석 한 귀퉁이엔 ‘태조대왕어필’ 등의 묘호(廟號·왕이 죽은 뒤 올리는 이름)가 적혀 있다. 왕이 살아있는 동안 새겨진 게 아니라 후대 왕이 선왕의 글씨를 돌에 새겨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조의 경우 묘호가 적혀있지 않다. 박물관 김연수 유물과학과장은 “영조 어필 각석은 당대에 새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내리는 훈유와 편지, 시(詩)는 물론이요 자기소개서와 연보, 나이가 들어 눈이 잘 보이는지 시험하려고 아주 작게 쓴 글씨까지 각석으로 남겼다. 영조는 선대 왕들이 남긴 어필각석에 여러 자료를 추가해 『열성어필(列聖御筆)』 탁본첩을 펴내기도 했다. 조선의 기록문화가 영조 대에 꽃피웠음은 각석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셈이다.

 보물 515호로 지정된 태조 친필 문서 ‘숙신옹주가대사급성문(淑愼翁主家垈賜給成文)’의 경우 각석이 두 벌이나 남아있다. 태조가 딸 숙신옹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그 소유권을 손수 확증해준 집문서다. 친필과 각석이 동시에 남아있는 드문 사례다. 김연수 과장은 “건국 왕의 글씨라 더 귀하게 여겨 후대에 더욱 소중히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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