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와서 부침개나 먹어" 무서운 한마디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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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소설가

지난주가 설 명절이었다. 설은 추석과 더불어 대한민국 여자들의 극심한 스트레스 시기라고 알고 있다. 흉년이 든 북한도 아닌데 고난의 행군기를 해마다 두 차례씩 겪는 거다. 오죽하면 ‘애정남’이 명절 때 남자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정해 주기까지 했겠는가. 그렇지만 난 지난주 우리 가족 여자들이 만든 전과 동그랑땡을 부엌에서 거실로 배달시켜 먹고 그녀들이 설거지하는 동안 쿨쿨 낮잠을 잤으니 결국은 나쁜 남자였던 셈이다. 솔직히 그녀들의 스트레스는, 나에겐 이웃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같은 거다. 그 끔찍한 참상에 눈물이 샘솟지만 체감적으론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일이라는 뜻.

 하지만 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라 지난주 이 칼럼의 자매편인 ‘임경선의 여자란 왜’를 읽으며 제사를 없애야 한다는 트윗에 십분 공감했다. 그렇지만 마음으로 100만 번의 ‘리트윗’을 하면 뭐하나, 여자들 보기엔 악어의 눈물이 더 얄미운 법일 거다.

 그건 그렇고 이번 설이 괴로웠던 건 후배 L의 여자친구 S도 마찬가지였다. 올봄 결혼식을 앞두고 있으니 ‘우리집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는 예비 시댁에서 은연중에 일손을 거들라는 압박을 받은 것. 물론 예비 시어머니는 “아가야, 시간 되면 와서 부침개나 먹고 가라”고 했다지만 세상에 누가 그걸 곧이 듣는단 말인가. 결국 예비 시댁에서 전을 부치던 S, 놀고 있는 예비 시누이를 보면서 공주처럼 귀염받으며 보냈던 친정의 명절 풍경이 생각나 더 서러웠다고 한다.

 뒤늦게 S를 달래느라 고생하는 L에게 한마디했다. “그러게 옆에서 좀 도와주지.” 말을 하고 나니 내 처지에서 할 충고는 아닌 걸 알았다.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것 하나. L의 어머니, 즉 S의 예비 시어머니 역시 나중에 시댁에서 명절을 보낼 딸이 측은할 텐데 며느리한텐 왜 이러는지. 이럴 땐 한 몸에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동시에 품고 있는 여자라는 존재가 불가사의하다. 우리 남자들은 왜 명절 때만 되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는지 궁금한 것처럼.

조현 소설가·『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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