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찰 쟁여둔 미국·유럽 기업 ‘Occupy 역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미국·유럽 기업의 ‘현찰’이 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부·가계는 한 푼이 아쉬운 판에 기업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움켜쥐고 있어서다.

 얼마나 많기에 그럴까. 지난해 9월 말 현재 미국 일반 회사의 현금 자산이 무려 1조7300억 달러(약 1946조원)나 된다.

금융회사의 현금을 제외한 금액이 그렇다. “유럽 일반 기업도 9000억 달러 가까이 쌓아 놓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최근 전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미국 기업이 쥐고 있는 현찰은 주요 7개국(G7) 가운데 하나인 캐나다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과 엇비슷하다”고 29일 전했다. 지난해 캐나다 GDP는 1조7600억 달러(약 1980조원)였다. 평균적으로 미 기업의 현금 자산 비중은 전체 자산의 6% 정도다. 최근 60년 사이 최고 수준이다.

 미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현찰을 쥐고 있는 기업은 애플이다. 애플은 지난해 말 기준 976억 달러(약 1098조원)를 보유하고 있다. 동유럽 슬로바키아의 지난해 GDP(972억 달러)보다 많다.

 미국·유럽 기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현금 자산을 늘리기 시작했다. 유동성 위기 등 만약의 사태를 막기 위한 방파제 격이다.

마침 이들 기업의 수익성도 좋아졌다. FT는 “기업이 위기를 이유로 고용을 줄여 임금 비용이 급격하게 줄어든 바람에 이익폭(마진)이 아주 높아졌다”고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제품을 제조해 판매할 때마다 현금이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미국·유럽 경영인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현금 덕에 콧노래를 부를 판이다. 반면에 정부와 주주는 불만이 가득하다. 경제데이터 전문회사인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기업 경영인은 쌓인 현금을 주주에게 돌려주려 하지 않는다.

 FT는 “설문조사 결과 경영인이 2012년에 현금자산의 36% 정도만을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에 투입할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미국·유럽 기업의 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두 지역의 금리는 넘치는 유동성 때문에 사실상 제로 수준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노년층이 믿고 의지할 수익원이 마뜩잖은 상황인 셈이다.

 로이터통신은 “현금 비축으로 기업의 생존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그 바람에 노후대책 등은 재정난에 시달리는 정부와 가계의 몫이 되고 있다”며 “그 결과 불만의 화살이 금융회사뿐 아니라 현찰을 움켜쥐고 있는 일반 기업에도 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 현금 자산의 역풍인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