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시간기행 3편 - 최초의 트레이드

중앙일보

입력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1920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다. 적자에 시달리던 보스턴의 구단주가 40만달러에 루스를 팔아치운 것.

하지만 루스는 트레이드 이후 가공할만한 홈런포를 양산해내며 강타자로 거듭났고, 양키스는 1921년부터 7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양키스 전성시대를 이어나갔다. 루스가 대스타가 되는 데에는 이 트레이드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양키스가 루스를 트레이드해오지 않았다면 양키스가 그와 같은 최강전력을 구축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루스는 양키스에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야구팬들에게 있어서 트레이드라는 단어는 너무나 익숙해졌다. 각 구단들은 팀 전력 보강을 위해 다른 팀으로부터 우수선수들을 돈으로 사들여오거나 자기팀의 선수와 맞교환식으로 트레이드를 해왔다.

위의 베이브 루스의 경우처럼 어느 팀에서 평범한 활약을 보이던 선수들이 트레이드된 후에 화려한 야구인생을 꽃피우는가 하면 새로운 팀에서 적응을 하지 못해 기억속에서 잊혀진 선수들도 많은 것이 트레이드의 ‘빛과 그림자’이다.

어떤 사건이든 첫번째로 행해진 일들은 지켜보는 이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게 마련이다.

1982년 12월 7일. 한국프로야구에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오대석, 천보성, 배대웅 등 삼성의 두터운 내야진의 틈바구니에서 제 갈길을 찾지 못했던 서정환이 해태로 트레이드된 것이다. 선수간 맞트레이드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1천6백만원에 이루어진 현금 트레이드로서 국내프로야구 트레이드 1호. 서정환 본인이 서영무 前감독에 강력히 요청을 해서 이루어진 트레이드이다.

서정환은 해태로 트레이드된 후에 버젓이 팀의 기둥으로 떠올랐다. 해태의 유격수를 번갈아가면서 맡고 있던 조충열, 임정면을 밀어내고 시즌 초부터 주전유격수로 자리잡았다. 82년 삼성에 있을 때보다 51경기 더 많은 98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7를 기록했으며 83년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광주에 김일권, 차영화 등 아마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있어 낯설은 땅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이후 서정환은 89년까지 해태의 주전유격수로 몸담으면서 통산 0.267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그의 빠른 발을 이용해 8년 통산 136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86년에는 43개의 도루로 시즌 도루왕에 오르기까지 했다. 김일권-서정환-이순철-이종범으로 이어지는 역대 최고의 대도 족보에 한 축이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서정환은 89년까지 해태가 V5의 위업을 달성하는 동안 수비의 핵인 유격수를 맡으면서 팀의 수비라인을 리드해왔고 이로 인해 성공적인 트레이드의 효시가 되어, 이를 본받아 80년대말부터 본격적인 트레이드가 성행했었다.

베이브 루스의 경우처럼 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서정환이 해태에 들어온 후 팀이 상승세를 타며 최강의 팀이 됐다는 데서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겠다.

서정환은 은퇴 후 90년부터 해태에서 코치로 활동하다 96년부터 삼성에서 코치로 98,99년에 감독으로 활동했었다.

현재 서정환 前감독은 모스포츠신문에서 야구칼럼을 쓰고 있다.

한국프로야구 트레이드 1호인 서정환 前감독은 당시의 트레이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겁낼 필요 없었고 여건이 되는 팀에 가서 그저 열심히 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며 자신도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이 그를 스타반열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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